▲템포 바이러스…페터 보르샤이트 | 들녘
“더 빨리 생각하라. 오늘 당신이 낸
아이디어는 앞으로 5년 후에는 낡은 것이 될 것이다. 완벽한 것을 구하려 하지 마라. 그걸 찾느라 1년 반이 늦어지거나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98.5%의 완벽함이 낫다. 완벽한 것이란 슬로모션인 반면에 환상적인 것은 광속으로 움직인다.” 독일 ABB 콘체른이 가장 앞세우는 슬로건이다. 이 기업의 최고위 임원 가운데 한 사람인 스웨덴 출신의 퍼시 바네빅은 “달팽이 속도로 완벽함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서너 가지 오류를 범하더라도 차라리 열 가지 일을 빨리 결정하는 것이 더 낫다”고 끊임없이 직원들을 다그친다. 상품 수명의 단축속도가 너무나 빨라진 기업환경 때문이다.
누군가 ‘경제는 더 이상 왈츠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이상 행군 속도로 나아가지도 않는다’고 짐짓 고상하게 분칠한 말과 다르지 않다.
하기야 지난날 1년이 걸리던 유전자 연구가 요즘은 2시간이면 충분하다. 물리학자들은 1000조 분의 1초인 ‘펨토초’보다 짧은
레이저의 맥동시간을 계산해 낸다.
19세기말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속보로 걷는 말을
촬영할 때 2분의 1초 동안 사진 12장을 찍었다. 1930년 사진기사 해럴드 애드거튼이 날아가는 총알을 찍을 때 셔터 속도는 ‘1마이크로초(1/106초)’였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시간을 사냥하면서 ‘아토초(1/1018초)’까지 좁혀 나갔다. 연구·개발에서 지식의 반감기(半減期)가 날로 짧아지고 있어 속도전은 불가피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속도가 권력이자 돈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가속도는 인간과 재화뿐만 아니라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도 단 몇 시간 내에 지구 전역으로 확산시킨다. 2003년 초 중국에서 발생한 전염병 사스가 중국 국민들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유럽과 캐나다에 상륙했던 게 좋은 예다. 지금 지구촌은 공간이란 개념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속도는 거의 ‘동시성’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대인들은 시간을 아끼는 것조차 조급하게 굴 정도다.
하지만 태초에는 느림이 있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해 애써 시간의 지배자가 되려 하지 않았다.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일과를 끝내는 식이었다. 언제부턴가 빠름이 미덕으로 바뀌었다. ‘그 언제부터’가 서양의 중세 이후다. 모든 사람들이 ‘속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독일 마르부르크대에서 사회·경제사를 가르치는 페터 보르샤이트가 쓴 ‘템포 바이러스’(들녘)는 ‘속도’라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 문화사다. 저자는 산업, 교통, 노동뿐만 아니라 군사, 스포츠, 예술, 일상생활 어느 분야든 거의 빠짐없이 현미경을 들이댄다. 여기엔 역마차, 기차, 증기선, 방적기, 인쇄술, 자동차, 비행기, 무기, 전신 전화, 가정의 표백제에 이르기까지 속도와 인연을 맺은 온갖 이기(利器)의 미시사가 등장한다. 이것도 자칫 선입견일 수 있지만 독일인의 치밀성을 훔쳐보는 듯하다. 지은이는 속도에 ‘거대한 문화혁명가’라는 멋진 별명을 지어줬다.
속도전의 첫 주역은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상품과 금전 거래에서 철저하게 속도를 이용했다. 산업혁명은 달리는 말의 채찍이 됐다. 테일러리즘과 포드주의가 속도계의 가속화에 불을 지른다. 카를 마르크스도 일찍이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속도 압박을 예견한 바 있다. ‘결국 모든 경제를 녹여버릴 시간의 경제’라면서. 언론인이자 작가인 헤르만 케서 역시 급속도로 움직이는 세계를 태동시키고 주도하는 것은 바로 ‘비즈니스 신’이라고 갈파했다.
속도 바이러스의 첫 매개자는 사실상 기차였다. ‘시간은 금이다’란 영국 속담이 바로 기차 때문에 유행한 말이다. 이동 시간을 줄이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기차 때문에 공간은 죽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지은이의 눈썰미처럼 부유한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움직이는 속도와 박자도 빨라진다. 빨리 말하고 빨리 일하는 문화권에서는 산책을 나가는 사람도 약속이 있는 사람보다 느리게 다니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매니저들은 일반 근로자들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일반 근로자는 실업자보다 빨리 움직인다.
속도는 바이러스마냥 하염없이 전염된다. 여유를 먹고사는 것처럼 보이는 문인이나 예술가조차 속도의 마력과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렇다 보니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느림이라는 반작용으로 맞선다. 저자는 속도 바이러스의 야누스 같은 두
얼굴도 빼놓지 않고 조명한다.
지은이의 마지막 말이 짠하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는 데는 시계가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주는 혜택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하일 엔데의
소설 ‘모모’의 주인공이 한 말을 기억하고 싶다고 여운을 하나 더 남긴다. ‘시간은 삶이다. 그리고 삶이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 할수록 그것을 조금 더 갖게 된다.’
속도에 중독된 사람뿐만 아니라 ‘느림의 미학’을 갈구하는 사람들도 이 책을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560쪽에 달하는 두툼한 이 책은 속도의 역사처럼 초반부엔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지만 후반부엔 속도감 있게 읽힌다. 두행숙 옮김. 2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