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3-21 16:49:25ㅣ수정 : 2008-03-21 16:50:16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윌리엄 존스턴 | 글항아리
600년을 이어온 합스부르크 제국이 마지막 호흡을 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서도 유례없이 웅숭깊고 다양한 문화와 지성의 스펙트럼을 배태하고 있었다. 시나브로 다음 세대의 정신사를 풍성하게 수놓을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의 작가 헤르만 브로흐는 흔히 ‘세기말’로 일컫는 1848~1918년, 합스부르크 왕조의 문화 중심이었던 오스트리아 빈을 ‘즐거운 종말’이란 개념어로 규정한다. ‘즐거운 종말’은 종종 ‘벨 에포크(좋았던 시절)’로 부르는 시기다.
미국 문화사학자 칼 쇼르스케가 그의 퓰리처상 수상작 ‘세기말 비엔나’에서 이렇게 갈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엔나에서는 새로운 고급문화가 마치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그 온실의 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
정신사 연구에서 독보적인 기념비를 쌓아올린 윌리엄 존스턴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회문화사를 재발견해낸다. 존스턴의 역작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원제·The Austrian Mind)’은 70여 명에 이르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 문인들의 지성적 삶을 새롭게 조명해 지적 유산을 복원한다.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의 정신사와 지성사에 관한 조감도인 동시에 세밀화인 셈이다.
이를 두고 오스트리아 역사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어는 존스턴이라는 ‘미국인 콜럼버스’가 유럽의 대륙 하나를 발견했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막상 유럽인 자신들은 이 ‘제2의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대서양 건너서 관찰하는 학자의 예리한 눈으로 조망한 게 경이로웠던가 보다.
지은이 존스턴은 오랫동안 독일 중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정신문화의 대륙’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소홀히 해 온 사실에 칼날을 들이댄다. 따지고 보면 혁명적 영향력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르틴 부버, 에드문트 후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한스 켈젠, 빌헬름 노이라트 등에 견줄 만한 철학자나 사회 이론가를 한꺼번에 배출한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요제프 슘페터, 게오르크 루카치, 카를 만하임, 오토 랑크, 테오도르 헤르츨 같은 학자와 지성인들은 또 어떤가.
음악의 토대인 조성(調聲)마저 깨부순 현대 음악의 창시자 아르놀트 쇤베르크, 현대 건축의 개념을 정립한 오토 바그너, 인간 내면세계를 미술에 투영하며 황금빛 문화의 정점을 보여준 구스타프 클림트, 진정한 표현주의 예술가 오스카 코코슈카. 하나 같이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가 낳은 거장들이다. 가장자리에 머물기엔 너무나 큰 나무들이 아닌가.
이처럼 많은 거목이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유대인 변수가 적지 않았음에 주목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대인 수가 많았던 것은 물론 농촌까지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 지식인들이 특유의 강점으로 이 시기의 사상과 문화계를 주도했다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존스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사상가들은 표층과 깊이의 대가들이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놓은 기초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책의 맨 앞머리에서 헌사를 바친다. 20세기 지성사의 격변을 주도한 프로이트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극치에 이른 상찬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프로이트는 동시대인에게 아버지의 형상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사유의 뿌리를 추적하는 작업은 그의 고유한 의식을 들춰내는 것을 의미하며, 그를 비판하는 것은 부친 살해에 맞먹는 일이다.”
지은이는 정신사 연구와 서술에서 이념사, 사상가의 사회사, 참여 지식인들의 사회학을 구분하자고 주창하면서 주요 인물들을 이 같은 원칙에 따라 분류하고 있는 게 이채롭다. 빈의 카페, 극장, 콘서트홀의 창의성을 꽃피웠던 유미주의,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실증주의와 인상주의의 희한한 공생, 뵈멘의 개혁가톨릭주의자들에 대한 통찰도 돋보인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문화사가 그동안 홀대받은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를 꼽는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처럼 지리적 단일체로 살아남지 못하고 찢어진 게 그 첫째 이유다. 두 번째는 제국에서 사용된 언어가 독일어 외에 체코어, 폴란드어, 마자르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탓도 크다. 이밖에 히틀러의 민족말살정책, 영어·프랑스어권 학자들의 좁고 오만한 시야, 점점 더 작은 단위로 분절되고 세분화되는 문화연구 풍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은이는 진단하고 있다.
매 장마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고 시작하는 19세기 최고의 오스트리아 여류작가 마리 에브너-에셴바흐(1830~1916)의 촌철살인 같은 명구들이 사뭇 상징적으로 파고든다. ‘죽지도 않고 고칠 수도 없는 병, 그것이 가장 나쁜 병이다. 위대한 이념을 품고 있는 남자는 불편한 이웃이다. 모든 지식은 의심에서 출발해 믿음으로 끝난다. 창작은 창조주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한다. 어떤 사람이 점쟁이라면 관찰자일 필요가 없다. 고대인들의 암브로시아는 후대인들의 일용할 양식이다.’
쇼르스케의 ‘세기말 비엔나’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책일 것 같다. 736쪽에 이르는 책의 두께만큼이나 지적 포만감도 든다. 자칫 소화불량까지 걱정해야할 판이다. 변학수·오용록 외 옮김. 2만8000원
미국 문화사학자 칼 쇼르스케가 그의 퓰리처상 수상작 ‘세기말 비엔나’에서 이렇게 갈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엔나에서는 새로운 고급문화가 마치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그 온실의 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
정신사 연구에서 독보적인 기념비를 쌓아올린 윌리엄 존스턴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회문화사를 재발견해낸다. 존스턴의 역작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원제·The Austrian Mind)’은 70여 명에 이르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 문인들의 지성적 삶을 새롭게 조명해 지적 유산을 복원한다.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의 정신사와 지성사에 관한 조감도인 동시에 세밀화인 셈이다.
이를 두고 오스트리아 역사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어는 존스턴이라는 ‘미국인 콜럼버스’가 유럽의 대륙 하나를 발견했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막상 유럽인 자신들은 이 ‘제2의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대서양 건너서 관찰하는 학자의 예리한 눈으로 조망한 게 경이로웠던가 보다.
지은이 존스턴은 오랫동안 독일 중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정신문화의 대륙’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소홀히 해 온 사실에 칼날을 들이댄다. 따지고 보면 혁명적 영향력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르틴 부버, 에드문트 후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한스 켈젠, 빌헬름 노이라트 등에 견줄 만한 철학자나 사회 이론가를 한꺼번에 배출한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요제프 슘페터, 게오르크 루카치, 카를 만하임, 오토 랑크, 테오도르 헤르츨 같은 학자와 지성인들은 또 어떤가.
음악의 토대인 조성(調聲)마저 깨부순 현대 음악의 창시자 아르놀트 쇤베르크, 현대 건축의 개념을 정립한 오토 바그너, 인간 내면세계를 미술에 투영하며 황금빛 문화의 정점을 보여준 구스타프 클림트, 진정한 표현주의 예술가 오스카 코코슈카. 하나 같이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가 낳은 거장들이다. 가장자리에 머물기엔 너무나 큰 나무들이 아닌가.
이처럼 많은 거목이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유대인 변수가 적지 않았음에 주목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대인 수가 많았던 것은 물론 농촌까지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 지식인들이 특유의 강점으로 이 시기의 사상과 문화계를 주도했다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존스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사상가들은 표층과 깊이의 대가들이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놓은 기초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책의 맨 앞머리에서 헌사를 바친다. 20세기 지성사의 격변을 주도한 프로이트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극치에 이른 상찬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프로이트는 동시대인에게 아버지의 형상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사유의 뿌리를 추적하는 작업은 그의 고유한 의식을 들춰내는 것을 의미하며, 그를 비판하는 것은 부친 살해에 맞먹는 일이다.”
지은이는 정신사 연구와 서술에서 이념사, 사상가의 사회사, 참여 지식인들의 사회학을 구분하자고 주창하면서 주요 인물들을 이 같은 원칙에 따라 분류하고 있는 게 이채롭다. 빈의 카페, 극장, 콘서트홀의 창의성을 꽃피웠던 유미주의,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실증주의와 인상주의의 희한한 공생, 뵈멘의 개혁가톨릭주의자들에 대한 통찰도 돋보인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문화사가 그동안 홀대받은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를 꼽는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처럼 지리적 단일체로 살아남지 못하고 찢어진 게 그 첫째 이유다. 두 번째는 제국에서 사용된 언어가 독일어 외에 체코어, 폴란드어, 마자르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탓도 크다. 이밖에 히틀러의 민족말살정책, 영어·프랑스어권 학자들의 좁고 오만한 시야, 점점 더 작은 단위로 분절되고 세분화되는 문화연구 풍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은이는 진단하고 있다.
매 장마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고 시작하는 19세기 최고의 오스트리아 여류작가 마리 에브너-에셴바흐(1830~1916)의 촌철살인 같은 명구들이 사뭇 상징적으로 파고든다. ‘죽지도 않고 고칠 수도 없는 병, 그것이 가장 나쁜 병이다. 위대한 이념을 품고 있는 남자는 불편한 이웃이다. 모든 지식은 의심에서 출발해 믿음으로 끝난다. 창작은 창조주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한다. 어떤 사람이 점쟁이라면 관찰자일 필요가 없다. 고대인들의 암브로시아는 후대인들의 일용할 양식이다.’
쇼르스케의 ‘세기말 비엔나’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책일 것 같다. 736쪽에 이르는 책의 두께만큼이나 지적 포만감도 든다. 자칫 소화불량까지 걱정해야할 판이다. 변학수·오용록 외 옮김. 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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