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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장바구니

입력 : 2008-03-07 17:50:47수정 : 2008-03-07 17:51:12

중국에서는 ‘의식주(衣食住)’라 하지 않고 ‘식의주(食衣住)’라고 일컫는다. 전통적으로 식생활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기 때문인 듯하다. 예부터 의식동원(醫食同源·의약과 먹는 것은 뿌리가 같다)이고 음화식덕(飮和食德·마시고 먹는 일이 미덕이다)이라 여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어·프랑스어권을 비롯한 서양에서도 ‘식의주’ 순서다.

북한에서는 다른 경로로 ‘의식주’ 대신 ‘식의주’란 말을 쓴다. 북한이 우리말의 관용어가 된 의식주를 식의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84년 무렵부터다. 김일성 주석이 먹는 문제가 입는 문제에 우선한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93년 발간된 ‘김일성 저작집’ 39권에는 이처럼 고쳐 쓰도록 한 까닭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김 주석은 85년 10월 정무원(내각) 책임일꾼들에게 한 담화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서 먹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옷이나 집 같은 것은 부족하여도 좀 참을 수 있지만 배고픈 것과는 타협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먹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의식주라는 말을 식의주라고 고쳐 쓰도록 하였다”고 강조했다. 80년대 중반 이미 식량난의 징후가 나타난 것으로 미뤄 보면 짐작이 간다.

한반도에서 굳이 의식주라 한 것은 먹고 자는 것에 비해 의생활이 더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일제(日帝)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설도 없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민들의 장바구니 물가에 대한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직접 듣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우리도 먹는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됐다. ‘입맛 잃게 만든 라면값’ ‘서민 울리는 자장면’ ‘외식이 무섭다’ ‘장보기 겁나시죠?’…. 언론의 기사 제목만 봐도 예사롭지 않다. 미국경제 위기설과 원유값 급등으로 심란한 터에 세계적인 밀 대란이 겹쳐 애그플레이션이란 생경한 낱말까지 일상적으로 듣게 됐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는 경상도 사투리의 익살마저 썰렁해져 버릴 분위기다.

인사 파동의 여진을 겪고 있는 이명박 정부엔 ‘밀가루 장사 하면 바람이 불고, 소금 장사 하면 비가 온다’는 야속한 속담이 실감날 법도 하다. 하지만 라면값 100원을 걱정하는 대통령과 서민들의 눈높이를 모르는 부자 참모진의 엇박자를 바로잡는 일이 선결과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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