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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석유 메이저

입력 : 2008-03-21 17:40:50수정 : 2008-03-21 17:41:42

유명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으레 음모론이 뒤따르곤 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다이애나 왕세자비, 말콤 X,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해 하고많은 저명인사들의 자·타살이 그렇듯이 이탈리아의 실업가 엔리코 마테이(1906~1962)의 죽음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국영 에너지회사 ENI의 초대 총재이자 이탈리아 경제 기적에 가장 큰 공헌자이기도 했던 마테이는 1962년 10월27일 전용기를 타고 시실리를 떠나 밀라노로 가는 도중 비행기가 폭발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정력적으로 일하던 쉰여섯 살의 마테이가 사망한 것은 우연한 사고로 보였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로 여기던 마테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란 유전 개발 독점권 협정 체결, 소련 원유 구매와 송유관 생산 등으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왔다. 미국의 엑손, 모빌, 셰브런, 텍사코, 걸프와 영국계 브리티시석유, 로열더치셸 등 7대 석유 메이저 기업에 ‘일곱 자매(Seven Sisters)’란 유명한 별명을 붙여준 사람도 그였다.

비행기 폭발사고 직후 로마 주재 미 중앙정보국(CIA) 책임자 토머스 카라메신스가 소리소문 없이 그곳을 떠난 것도 석연찮은 일이었다. 미국 정부는 마테이 죽음과 관련한 카라메신스의 보고서를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감독 프란체스코 로지가 ‘마테이 사건’이란 영화를 만들어 1972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정도로 이 사건은 미스터리였다.

세월이 흘러 ‘일곱 자매’는 이제 엑손 모빌, 셸, 비피-아모코, 셰브런-텍사코 등 네 자매로 바뀌었다. 게다가 ‘일곱 자매’의 자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러시아 가즈프롬, 중국 석유천연가스집단, 이란 국영석유사, 베네수엘라 PDVSA, 브라질 페트로브라스,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에 넘겨줘야할 신세다. 옛 일곱 자매는 전체 석유 생산량의 10%, 매장량의 3%만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석유 메이저로 군림하는 옛 자매들은 이라크 전쟁 5년의 유일한 승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목적이 사실상 석유에 있었던 점을 상기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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