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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 수염과 시가, 그리고 쿠바의 ‘영원한 반항아’ 카스트로

입력 : 2008-04-18 17:37:07수정 : 2008-04-18 17:37:12

▲피델 카스트로: 마이 라이프…피델 카스트로·이냐시오 라모네 | 현대문학

쿠바만큼 유난스레 평등을 강조하는 나라도 찾아보기 드물다. 헌법에 시시콜콜하다 싶을 만큼 구체적인 사안까지 명시할 정도다. ‘모든 인민은 어느 곳 어느 지역에서도 주거할 수 있으며, 어느 호텔에서도 머무를 수 있다.’ ‘모든 인민은 모든 식당과 기타 공공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 자유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게 사회주의 국가지만 이처럼 평등의 세밀화를 그려놓은 곳은 없다.

혁명 동지 체 게바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1960년대의 피델 카스트로(오른쪽).


여기엔 가슴 아픈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59년 혁명 이전 쿠바에서는 차별이 얼마나 심했던지 내국인은 들어갈 수 없고 외국인만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이 수없이 많았다. 그 중심에 미국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미국에 맞선 반제국주의의 선봉장이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라는 사실은 더 물을 필요가 없다.

미국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카스트로이지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나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비교적 살갑게 지내는 편이다. 클린턴은 현직에 있는 동안 “카스트로의 쿠바가 독재체제이긴 하지만 정(情)은 있는 나라”라고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카스트로와 클린턴은 2000년 9월 유엔에서 두 나라 정상으로서는 사상 처음 만나 잠시나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쿠바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국제정치의 풍운아인 카스트로가 지난 2월 집권 49년 만에 국가평의회 의장이라는 권좌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남으로써 혁명의 시대도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는 황혼에 접어드는 듯하다.

그의 자전적 회고록 ‘피델 카스트로: 마이 라이프’(원제: Fidel Castro. Biografia A Dos Voces)는 말로 쓴 독특한 전기다. 프랑스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이냐시오 라모네가 2년여 동안 무려 100시간이나 함께 다니며 대담한 것을 엮은 책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담 형식으로 완성된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대화’를 연상케 한다.

대담자 라모네는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 맞서는 ‘세계사회포럼’의 주창자이자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는 유명한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낸 진보적 지성인이기도 하다. 라모네가 이 책을 위해 카스트로에 관한 수십 권의 저술과 관련 기사를 소화한 뒤 인터뷰에 나서 궁금증을 빠짐없이 풀어냈다. 글말보다 입말을 즐기고 그게 더 설득력을 지니는 카스트로이고 보면 스스로 글을 쓴 것보다 훨씬 생동감을 준다.

라모네는 카스트로를 ‘국제정치의 마지막 거룩한 괴물’이라고 표현한다. 49년 간에 걸친 장기 집권자로서 비판과 숭앙을 한 몸에 받아온 그에게 어울리는 별칭인 듯하다.

책은 카스트로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전 생애는 물론 1868년 독립전쟁으로 막을 올린 쿠바 혁명사까지 관통하고 있어 쿠바의 현대사가 한 눈에 조감된다.

라모네가 표현했듯이 ‘본능적인 위반자, 영원한 반항아’로서의 카스트로는 어릴 적부터 발아됐다. 초등학교 시절 손찌검하는 선생님을 물어뜯고 발길질하며, 성적표까지 감쪽같은 바꿔치기로 위조해 부모님에게 보여주는 문제아였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부유한 농장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권위에 반항했던 그가 시종 권위주의로 나라를 이끌었던 것은 아이러니다.

그렇지만 카스트로 스스로 국민들의 겉치레 우상숭배를 거부한 행적은 돋보인다. “쿠바에서는 권력남용이나 개인숭배, 동상숭배 같은 현상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혁명 초부터 거리나 작품이나 동상에 지도자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공공사무실에 공식적인 초상화를 걸지도 않습니다.” 북한 전역에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을 3만5000여개에 달하고 숱한 구호가 즐비한 것과 사뭇 대비된다.

라모네는 카스트로가 매우 검소하고 거의 스파르타인처럼 산다고 전한다. 사치품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없고, 가구도 검소하기 이를 데 없다. 음식도 소탈한 건강식뿐이다. 심지어 정적들도 그가 지위를 이용해 부를 쌓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 지도자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카스트로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문학 속의 주인공 돈키호테다. 그는 돈키호테를 자신의 고귀한 희망과 정의,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행동하는 인물로 여긴다.

스페인 내전을 토대로 한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가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벌어진 혁명 전투의 주요한 전술적 참고서가 됐다는 술회가 흥미롭다.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쿠바 혁명, 혁명 동지 체 게바라와의 관계와 평가, 미국과의 끝없는 갈등과 마찰, 중남미 국가들과의 유대, 1960년대 미사일 위기와 소련 붕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비판 등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숫자와 세세한 부분까지 재생해 내는 탁월한 기억력이 놀라움을 더해준다.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 재판에서 심금을 울렸던 변론 “역사가 나를 용서할 것이다”를 주제로 한 대목은 사실적이면서도 한결 감동적이다. 카스트로는 쿠바를 의료·교육 강국으로 끌어올린 업적을 조목조목 부각시키고, 트레이드마크인 수염과 시가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도 빠뜨리지 않는다.

책은 카스트로의 생각을 가감 없이, 어떤 평전보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반면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그의 시각이 일방적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것도 거짓말은 물론 과장도 하지 않는다고 잊을 만하면 상기하는 부분에서 정치 지도자의 특성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송병선 옮김. 3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