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2-06 17:39:05ㅣ수정 : 2009-02-06 17:39:07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제니스 펙 | 황소자리
‘지상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에 대한 상찬은 한 두 마디로 불가능한가 보다. “오프라 윈프리는 아마도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 교황을 제외하고는 어느 대학 총장이나 정치가, 종교적 지도자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미국 연예정보 월간지 배니티 페어의 평가다. 이도 성에 차지 않는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미미 에빈스 기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윈프리는 최고의 인물들을 합쳐 놓은 듯한 존재다. 동서양 철학자와 뉴에이지 계몽운동 지도자들을 하나로 합친 것 같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한 칼럼니스트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영국인들이 군주를 투표로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옥좌에 올라서 왕관을 쓰시오, 오프라.” 작가 프랜 리버위츠는 윈프리가 하나의 종교에 가깝다고 했다. 로스 페로가 이끄는 개혁당은 윈프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 했을 정도다. 대통령 후보가 되진 않았지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사실상 탄생시켜 킹메이커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이름은 이제 하나의 동사, 특정현상을 지칭하는 명사로까지 자리잡았으니 덧붙이면 군더더기나 다름없다. ‘누군가를 오프라하다’라는 말은 “고백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로 친근하면서도 집요하게 캐묻는다”라는 의미다. 내셔널 리뷰는 ‘오프라화’를 “한 나라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통째로 개조하는 일”이라고 일컫는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흑인 사생아가 모든 악조건을 뛰어넘어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자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브랜드 파워가 된 것을 기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만하면 뉴스위크가 21세기를 ‘오프라의 시대’로 명명한 것을 과장이라고 나무랄 수도 없겠다. 윈프리에 관한 책이 대부분 용비어천가처럼 된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 미디어 아이콘이자 문화권력인 윈프리에게 칼을 들이대는 여전사가 용감하게 나타났다. 아니 칼보다 강하다는 펜을 들었으니 더 무섭다.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원제 The Age of Oprah: Cultural Icon for the Neoliberal Era)를 쓴 콜로라도 대학의 제니스 펙 언론홍보대학원 교수가 주인공이다.
펙은 신화가 된 윈프리의 인간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편향성과 휴머니즘의 허실을 조목조목 해부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윈프리가 성공가도에서 신자유주의에 영합하며 미디어 권력으로 도약하는 과정을 샅샅이 캔다.
그가 동원하는 칼은 더글러스 켈너의 ‘진단 비평’이라는 방식이다. 저자는 먼저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견해를 수용한다. 그런 전제 아래 윈프리의 거시적인 사회역사적, 정치경제적 과정 간의 관계를 파고들어간다. 윈프리의 대중적 신격화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거시적 과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지은이는 윈프리가 부와 명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이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혁명과 때를 같이 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여긴다.
지은이가 윈프리에게 칼을 들이대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전 운 따위는 믿지 않아요. 저는 절대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만하고 위선에 가득 찬 말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지은이를 더욱 열 받게 만든 것은 소득이 윈프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이 그의 말이라면 쌍수를 들어 호응할 뿐만 아니라 ‘윈프리의 십계명’을 외우며 흉내 내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우선 윈프리 쇼가 텔레비전을 ‘최고의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거나 또 다른 ‘해방의 정치학’이라는 일반 견해와는 달리 레이거니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논리를 확대재생산했다고 단언한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결함과 책임으로 몰아가는 접근법이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특히 빈곤에 관한 프로그램에서는 뿌리 깊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과 가정의 병적인 문제로 치부했다고 여긴다.
실업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정치·경제적 문제로 다룰 수 있는 능력 부족이 토크쇼 전반에 걸쳐 뚜렷이 드러났다고 매섭게 꼬집는다. 빈곤과 실업에 관한 방송은 모두 로널드 레이건의 이데올로기 프로젝트를 그대로 베꼈다는 주장을 편다.
엄청난 독서 열풍을 일으킨 ‘오프라 북클럽’ 프로그램도 긍정적인 효과가 적지 않지만 이데올로기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윈프리가 불우학생들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세운 학교 역시 소수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돈을 쏟아부어 전시효과를 노린다는 비난의 목소리를 빼놓지 않았다.
윈프리는 전반적으로 엘리노어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와 마틴 루터 킹의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여성인권운동과 민권운동의 급진주의는 교묘하게 피해갔다고 은근한 비난을 퍼붓는다. 윈프리의 말에는 ‘인종차별정책이나 부모의 환경을 탓해서는 안된다. 구하라, 믿으라, 그러면 얻으리라’는 메시지가 종합선물세트처럼 담겨 있다는 결론이다.
지은이는 윈프리가 모든 문제의 원인과 책임이 각자에게 있다고 역설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치적 가치를 되살리고 정치의 장이 제자리로 돌아가 맡은 몫을 다하게 해야 한다면서. 요즘 한국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어딘지 닮은 점이 많다. 다 읽고 나면 비판이 과도하지 않느냐는 느낌을 받을 독자도 있겠지만 비대칭적인 시각 교정에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박언주·박지우 옮김. 1만9800원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한 칼럼니스트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영국인들이 군주를 투표로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옥좌에 올라서 왕관을 쓰시오, 오프라.” 작가 프랜 리버위츠는 윈프리가 하나의 종교에 가깝다고 했다. 로스 페로가 이끄는 개혁당은 윈프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 했을 정도다. 대통령 후보가 되진 않았지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사실상 탄생시켜 킹메이커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이름은 이제 하나의 동사, 특정현상을 지칭하는 명사로까지 자리잡았으니 덧붙이면 군더더기나 다름없다. ‘누군가를 오프라하다’라는 말은 “고백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로 친근하면서도 집요하게 캐묻는다”라는 의미다. 내셔널 리뷰는 ‘오프라화’를 “한 나라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통째로 개조하는 일”이라고 일컫는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흑인 사생아가 모든 악조건을 뛰어넘어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자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브랜드 파워가 된 것을 기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만하면 뉴스위크가 21세기를 ‘오프라의 시대’로 명명한 것을 과장이라고 나무랄 수도 없겠다. 윈프리에 관한 책이 대부분 용비어천가처럼 된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 미디어 아이콘이자 문화권력인 윈프리에게 칼을 들이대는 여전사가 용감하게 나타났다. 아니 칼보다 강하다는 펜을 들었으니 더 무섭다.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원제 The Age of Oprah: Cultural Icon for the Neoliberal Era)를 쓴 콜로라도 대학의 제니스 펙 언론홍보대학원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가 동원하는 칼은 더글러스 켈너의 ‘진단 비평’이라는 방식이다. 저자는 먼저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견해를 수용한다. 그런 전제 아래 윈프리의 거시적인 사회역사적, 정치경제적 과정 간의 관계를 파고들어간다. 윈프리의 대중적 신격화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거시적 과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지은이는 윈프리가 부와 명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이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혁명과 때를 같이 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여긴다.
지은이가 윈프리에게 칼을 들이대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전 운 따위는 믿지 않아요. 저는 절대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만하고 위선에 가득 찬 말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지은이를 더욱 열 받게 만든 것은 소득이 윈프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이 그의 말이라면 쌍수를 들어 호응할 뿐만 아니라 ‘윈프리의 십계명’을 외우며 흉내 내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우선 윈프리 쇼가 텔레비전을 ‘최고의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거나 또 다른 ‘해방의 정치학’이라는 일반 견해와는 달리 레이거니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논리를 확대재생산했다고 단언한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결함과 책임으로 몰아가는 접근법이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특히 빈곤에 관한 프로그램에서는 뿌리 깊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과 가정의 병적인 문제로 치부했다고 여긴다.
실업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정치·경제적 문제로 다룰 수 있는 능력 부족이 토크쇼 전반에 걸쳐 뚜렷이 드러났다고 매섭게 꼬집는다. 빈곤과 실업에 관한 방송은 모두 로널드 레이건의 이데올로기 프로젝트를 그대로 베꼈다는 주장을 편다.
엄청난 독서 열풍을 일으킨 ‘오프라 북클럽’ 프로그램도 긍정적인 효과가 적지 않지만 이데올로기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윈프리가 불우학생들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세운 학교 역시 소수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돈을 쏟아부어 전시효과를 노린다는 비난의 목소리를 빼놓지 않았다.
윈프리는 전반적으로 엘리노어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와 마틴 루터 킹의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여성인권운동과 민권운동의 급진주의는 교묘하게 피해갔다고 은근한 비난을 퍼붓는다. 윈프리의 말에는 ‘인종차별정책이나 부모의 환경을 탓해서는 안된다. 구하라, 믿으라, 그러면 얻으리라’는 메시지가 종합선물세트처럼 담겨 있다는 결론이다.
지은이는 윈프리가 모든 문제의 원인과 책임이 각자에게 있다고 역설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치적 가치를 되살리고 정치의 장이 제자리로 돌아가 맡은 몫을 다하게 해야 한다면서. 요즘 한국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어딘지 닮은 점이 많다. 다 읽고 나면 비판이 과도하지 않느냐는 느낌을 받을 독자도 있겠지만 비대칭적인 시각 교정에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박언주·박지우 옮김. 1만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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