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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상록수

입력 : 2009-05-29 16:18:31수정 : 2009-05-29 16:18:32

1977년 5월 군에서 제대한 김민기는 선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부평의 한 봉제공장에 취직한다. 창고 재고관리 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여공들의 고단한 삶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게 됐다. 이를 지켜보다 공장 여공들을 불러모아 새벽마다 조학(朝學)을 시작한다. 원단에 쓰인 간단한 영어 단어조차 읽지 못해 애로를 겪는 여공들이 가슴아파서였다. 거의 날마다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밤 공부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야학(夜學)이 아닌 조학이었다.

그 사이 김민기는 함께 생활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주선하고 축가를 작사·작곡했다. 여공들에게는 친구 송창식이 만들어준 노래라고 둘러댔다. 그게 숱한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용기를 북돋운 ‘상록수’다. ‘상록수’는 김민기가 유일하게 용도를 정해놓고 쓴 노래라고 한다. 그 뒤 이 노래는 양희은의 앨범 7집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으로 탄생한다. 하지만 공식 발매와 동시에 금지곡이 됐다. ‘상록수’는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대학생들의 입으로, 노동자의 입으로, 민주투사들의 입으로, 수많은 민중의 입으로 불리면서 푸르게, 더 푸르게 자라났다.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상록수’는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금지곡에서 풀린다. 1998년에는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하고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만든 텔레비전 광고에서 주제곡으로 쓰인다. 골프 스타 박세리의 ‘맨발의 투혼’ 장면과 더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 바로 그 노래다. 2002년 3·1절 기념식 때는 양희은에 의해 축가로 불리는 파격이 일어난다. 정부 공식행사에서 대중가수가 축가를 부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금지곡 신세에서 정부 홍보물로, 공식 축하곡으로 진화한 ‘상록수’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기타를 치며 직접 노래하는 선거 홍보영상물에서 보듯이. ‘상록수’는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불렸고 생전에 그의 가슴 속에서 상록수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인간 노무현의 영혼이 담긴 ‘상록수’는 그의 서거와 함께 국민의 가슴을 깊고도 애잔하게 파고들었다. 추모 마지막 날 밤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노제 때 절정을 이뤘다. 아니 ‘상록수’는 끝나지 않았다. 변치 않는, 추운 겨울일수록 더욱 푸름을 뽐내는 상록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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