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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은행나무

입력 : 2009-10-09 18:17:02수정 : 2009-10-09 18:17:04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들어 사랑과 낭만, 희망과 장수의 상징인 은행나무는 모든 나무들의 시조 격이다. 3억년 전쯤 등장해 지구촌의 생명체들이 빙하기와 재해로 깡그리 사라질 때도 꿋꿋하게 은행나무는 살아남았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됐을 때도 은행나무는 너끈히 생존해 이듬해 싹이 돋았다고 한다. 그래선지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혈액순환제인 ‘징코민’이라는 약은 넘치는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은행나무의 추출액을 이용해 만든 것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은행나무가 ‘징코 빌로바’(Ginkgo Biloba)라는 학명을 얻게 된 데는 어이없는 이유가 있다. 스웨덴 식물학자 카를 폰 린네는 은행나무에 ‘Ginkyo’라는 학명을 지어 주었다. ‘은행’(銀杏)의 일본식 발음이다. 출판사 식자공이 잘못해 y를 g로 심었고 교정과정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Ginkgo’로 정착돼 버렸다.

징코민을 처음 개발한 독일은 자기 나라 은행나무 잎에서 이를 발견했다. 지금은 징코민 함유량이 가장 많은 것으로 밝혀진 한국의 은행나무 잎을 가져다 쓰고 있다. 원산지인데다 인건비가 싼 중국 것을 가져다 만들어봤지만 놀랍게도 징코민 성분이 한국 것에 비해 태부족이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잎이 유럽인에게는 은밀한 연모의 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순여섯 살의 괴테는 서른다섯 살 연하인 연인 마리안네에게 비밀스러운 의미가 담겨있는 은행나무 잎을 전하고 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본래 하나의 잎새인 것이 둘로 나뉜 것일까? 딱 어울리는 두 잎이 맞대어 놓여 하나처럼 보이게 된 걸까?’ 유럽에서 공원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19세기 초부터 아름다운 관상수로 은행나무가 인기를 끈 것은 괴테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설이 전해진다. 우리 선조들은 사랑의 징표로 은행 알을 선물로 주고받거나 몰래 나눠 먹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 밖에 있는 은행나무를 돌며 사랑을 다지기도 했다. 서울 정동길이 연인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도 은행나무의 정취 덕분이다.

은행나무가 인기 있는 가로수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 열매가 익으면 악취가 나는 데다 낙엽까지 많아 청소하기 어려워 다른 수종으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잎을 밟는 정겨움마저 사라져 가면 어찌나 삭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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