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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강자의 편에 서 있는 인권

입력 : 2008-12-05 17:44:50수정 : 2008-12-05 17:44:58


1948년 12월10일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장은 또 하나의 역사적인 과업으로 들떠 있었다. 숭엄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는 순간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잔혹한 만행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갈망하는 전 세계인의 간절한 소원이 담겼다.

그런 세계인권선언문이 ‘세계 최고의 기밀서류’란 별명을 지녔던 것은 아이러니다. 이 선언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 그 사본을 본 사람은 더욱 드물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세계인권선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장전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선언문은 몇 가지 이유에서 뜻깊다. 이 선언문은 사상 처음 모든 인간이 천부적으로 부여받는 기본권에 대해 명료하고도 포괄적인 소망을 제시했다. 오래 전부터 종교지도자, 학자들이 인권을 천명해 왔고 영국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과 프랑스 혁명 직후의 ‘인권선언’이 있었지만 세계인권선언문은 정부들이 채택한 포괄적이고 국제적인 선언문으로서는 최초였다. 해서 모든 국가와 민족이 성취해야 할 공동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값지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제법적으로 보면 세계인권선언문은 인권이 국가주권 안에서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책임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혁명적 사고였다. 이로써 인류는 개별국가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에 관한 책임이 국제사회에 있음을 처음 인정하게 됐다.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한 이후 만 60년. 세계는 제법 살 만한 곳으로 바뀌었다며 스스로 위안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권은 여전히 정치적이고 강자의 잣대로 재단되곤 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국제문제 전문 언론인 커스틴 셀라스는 <인권, 그 위선의 역사>(은행나무)에서 이런 목소리를 대변한다. 인권이라는 고상한 수사학에 현혹돼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게 요체다. 셀라스는 인권운동가와 단체, 인권을 표방한 정책이 목적보다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안타까운 눈으로 관찰하고 비판의 칼을 들이댄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벌어진 전범재판에서부터 냉전과 탈냉전, 유고슬라비아 전범재판, 이라크 전쟁 등 현재에 이르는 인권의 역사를 국제정치라는 저울로 잰다.

그는 약소국을 억압하고 정치적 이득을 챙기는 강대국들이 인권을 악용한 실례를 낱낱이 파헤친다. 셀라스의 눈에 비친 세계인권선언도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담겼다. 이라크 전쟁도 미국이 대량살상무기 외에 사담 후세인의 인권탄압을 또 다른 전쟁 명분의 하나로 내걸었으나 그곳에 인간 존엄의 가치가 제대로 세워지고 있다고 믿는 세계인은 거의 없다. 미국이 카터 행정부 이후 해마다 국가별 인권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하고 있으나 자국은 언제나 열외 지대로 남아 있다고 셀라스는 꼬집는다. ‘신은 인간에게 인권을 주지 않았다’는 도발적인 첫 제목으로 시작하는 지은이는 ‘인권이 현대 정치담론을 지배하는 가장 위대한 공용어’라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권이 ‘강자의 가장 고상한 윤리’라고 셀라스는 비튼다.

사실 세계 공통의 보편적인 인권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하는 과정에서는 물론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는 논쟁거리다. 기준, 관점, 눈높이, 방법론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게 인권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 1조의 이상은 인정하면서도 인권정책에는 목소리가 다른 까닭이다. 드높은 뜻을 지닌 인권의 한계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북한 인권에 대한 시선이 천차만별이고 담론의 수준도 마찬가지다. 다음주면 세계인권선언 60돌을 맞는 인류가 가야 할 인권 도정이 여전히 멀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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