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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베트남적 근대성’

입력 : 2008-12-12 17:17:17수정 : 2008-12-12 17:17:30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언젠가 한국의 대통령이 될 날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겁니다. 미국인 어머니와 케냐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듯이. 그런 상황이 오면 베트남 기자들이 한국 대선 취재에 대거 나서지 않을까요?”

연례 기자교환방문 계획에 따라 최근 베트남에 가서 기자가 던진 이 말에 그곳 언론인이나 정부 관료들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반응했다. 그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한국과 베트남은 어느덧 혈연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요즈음 우리 국민의 약 10%에 달하는 국제결혼인구 중 베트남 배우자가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결혼 이주민 외에도 노동자, 유학생, 기업인 등 다양한 이름으로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새로운 구성원으로 자리잡았다. 베트남 안에서도 한국인 이민자 수가 화교를 제외하면 가장 많고 베트남에서 한인의 비중과 영향력 역시 급증하고 있다. 특히 말로만 듣던 호찌민시 푸미흥 신도시는 한국인이 절반을 차지할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0.1% 상류층을 겨냥해 대만 기업이 건설했다는 이곳은 서울의 강남이나 분당, 일산보다 쾌적하고 안전하며 품격 있는 주거환경을 지닌 듯했다. 이곳 역시 올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를 받을 뻔했던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에서 읽은 최병욱 인하대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창비)는 격변하는 베트남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한국인의 시선으로 베트남 역사를 조명한 지은이는 ‘베트남적 근대성’에 주목한다. 딱딱한 학술서에서 벗어나 역사와 살아있는 현장을 접목해 가독성 높은 글쓰기 방식을 택한 그는 근대화과정의 특수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저자는 베트남 근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로 ‘공무’(公務)라는 특이한 제도를 꼽는다. 이는 베트남 왕조가 19세기 초부터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수백 명으로 구성된 선단을 중국, 말레이 반도, 필리핀, 인도 등에 보내는 제도다.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조차 19세기 후반부에서야 외국 문물에 눈을 떴던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이 동양에서는 어느 나라보다 일찍 근대화에 시선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훗날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아픔을 겪기는 했지만.

북·중·남으로 뚜렷하게 나뉘는 베트남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과 권력 안배정책의 배경도 현실정치나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해 객관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북쪽의 수도 하노이, 남쪽의 경제도시 호찌민, 메콩강 삼각지역의 농수산도시 껀터를 다른 눈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의 힘이 크다. 책에 인용된 “그 누구도 광활한 메콩델타를 보기 전에 베트남의 잠재력을 논하지 말라”는 티엔장 대학 응우옌 푹 응이옙 교수의 말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베트남 국민에겐 하늘 같으면서도 이웃집 아저씨 같은 존재여서 관청이나 심지어 언론사에서조차 거의 어김없이 좌상으로 모시는 호찌민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객관적 평가를 시도했다.

1986년 이후 계속되는 베트남식 개혁·개방정책인 ‘도이 머이’에 관해서도 저자는 ‘언어정치학의 산물’로 평가한다. ‘개혁’이란 낱말을 쓰기 어려운 정치적 환경에서 ‘쇄신’이란 의미가 큰 절충적인 형태의 조어를 만든 고육지책과 ‘도이 머이’에 관련된 지식인들의 내밀한 반응도 흥미롭다. 그러고 보니 하노이에서 하롱베이로 가는 길목에서 자주 목격되는 산 중턱 개발 현장은 자연보전 노력에도 신음하는 베트남 산하를 ‘도이 머이’와 중첩되게 만든다.

누군가 요즘 베트남인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일본인은 존경하나 좋아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은 좋아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함의는 각자 조금 무겁게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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