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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대선판에서 과소비하는 박정희 향수

 정지용의 시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살갑다못해 애틋하게 스며온다. 순우리말로 그윽하게 우려낸 시어는 섬세하고도 독창적이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같은 표현은 미윤(美潤)하기 이를 데 없다.


 ‘향수(鄕愁)’는 고향과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뜻한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향수’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이 병에 걸리면 스위스 용병이 몸져누웠고, 멀쩡하던 소녀가 사람을 죽인다. 스위스 의사 요하네스 호퍼는 ‘향수’를 뜻하는 단어를 ‘노스텔지어(nostalgia)’라고 명명했다. 조선으로 치면 숙종시대인 1688년에 쓴 박사논문에서다.


 스위스에서 시작한 노스탤지어라는 질병은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중남미 식민지로 퍼져나갔다. 노예무역의 희생자인 아프리카인들이 고향 땅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향수병에 시달렸다. 미국 남북전쟁 때도 군인들 사이에서 노스탤지어가 만연해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향수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 몸의 병이라고 여긴 향수가 곧 마음의 문제라고 인식되기 시작한다. 향수가 현대인의 심리적 안정제로 기능하고 마케팅과 정치적 선전도구로도 활용됐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좋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노스탤지어가 광고상품으로 떠올랐다. 2차대전 무렵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극우 지도자를 찬양하는 밑거름이 됐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탄생도 ‘과거로 이끄는 진한 향수’ 때문이었다. 트럼프가 선거운동 내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다시(again)’였다.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 향수는 한국 선거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소환하는 무형의 도구다. 보수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이념과 정책을 정립하지 못하고 정권을 잃을 위기를 맞자 과거 성공사례만 끊임없이 호출했다. 박정희는 추종자들에게 한민족을 가난에서 구원한 불세출의 영웅이며, 반신반인으로까지 추앙된다. 인권탄압과 민주주의 파괴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박정희가 ‘경제는 잘했지’라는 인식과 결별하지 못했다. 일부 젊은 계층은 경제성장우선주의의 매력 때문에 박정희 향수와 만난다.


 민주화를 억압한 독재자 박정희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사태로 치러지는 대선에서 득표요소로 설정된 것은 아이러니다. ‘추억팔이’ ‘복고 마케팅’이 먹혀드는 까닭은 실체가 잡히지 않지만 아련한 지난 시절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이 ‘노스탤지어는 고통이 제거된 기억’이라고 규정한 것 같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가장 스스럼없이 박정희 따라하기를 한다. 자신이 학생 시절과 노동운동 당시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박정희를 역설적으로 존숭하는 것은 노년층 보수 유권자들에게 소구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김 후보는 지난 주말 경북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하고 유세하면서 “박정희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더 발전시키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탄핵파면으로 물러나고 감옥생활까지 한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명예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도 했다.


 보수정치의 성지로 불리는 대구 서문시장에서도 박정희 정신으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후보는 독재자인 박정희를 언급하며 ‘이재명 독재국가’를 막아야 한다는 역설적인 유세를 했다. 김 후보는 경기도 농촌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농기계를 타며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앞서 당내 경선 때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을 찾았다. 박정희 동상을 광화문광장에 세워야 한다고도 했다. 이처럼 그는 기회만 있으면 박정희 향수를 호출한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때는 주자들이 앞다퉈 박정희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나섰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재임 시절 논란 속에 건립한 동대구역 앞 ‘박정희 동상’을 지키겠다며 직원들에게 불침번근무까지 서도록 하는 소동이 있었을 정도다.


 이와는 달리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박정희 향수팔이를 비판했다. 그는 “박정희 향수만 반복하는 정치인들이 TK(대구·경북) 민심을 착각하고 있다”면서 “여전히 향수팔이에 머물러 있는 TK 정치권은 지역 발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내란 수습 대통령 선거인데 박정희 향수에 매몰돼 있다는 건 모순적이다. 외연확장보다 내부세력 결집이 더 급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대중을 상대로 유발한 향수는 아득하고 인간적인 감정의 오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특히 정치적인 향수는 과거의 이상화로 말미암아 현재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한다. 최근 두차례의 미국 대선 때 트럼프가 내세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캠페인은 과거를 이상화해 미국 사회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단순히 회귀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나쁜 인식을 심어줬다.


 박정희 향수가 여전히 현실적으로 먹혀드는지 속단하기 어렵지만 부정적 영향만 남기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