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걱정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잦고 많다. 이런 우려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윤석열정부 들어 도드라지는 것 같다. 대통령실이 최근 전 정부 부처에 대한 복무점검에 나섰다는 소식까지 전해진다. 윤 대통령이 연초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보신주의에 빠진 관료주의 시스템에 대한 혁신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실이 모든 부처를 대상으로 복무점검에 나선 것은 지난해 8월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 사태 이후 두번째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4월 총선에 편승한 기강해이나 정치권 줄대기 같은 공직사회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서다.
공직사회의 무사안일과 보신주의를 상징하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을 우선적으로 막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 임기가 3년 넘게 남은 정권에서 공무원의 태만이 만연하다면 심각하다. 윤 대통령은 공직자들이 왜 일을 능동적으로 하지 않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가장 큰 문제가 지시는 윗사람이 하고 책임은 아랫사람에게 지우는 행태다. 이태원 참사의 행정책임자인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은 1년이 훨씬 지났으나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멀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의 해임 건의와 탄핵소추를 모두 당한 각료임에도 대통령이 아끼는 학교 후배이자 최측근이라는 이유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행정안전부 공무원들은 그런 장관 밑에서 일하고 있다.
세계 잼버리대회를 망친 장본인 가운데 하나인 김현숙 여성가족부장관도 문책 없이 온존한다. 호우 피해 실종자 수색 도중 숨진 채 모 상병 사건을 조사하던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항명 혐의로 기소됐으나 억울한 죽음에 책임지는 지휘관은 없다.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게 윤 대통령의 ‘책임철학’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되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기형적인 검찰제도가 만들어낸 신념체계 때문이 아닐까. 책임은커녕 외려 영전하거나 총선에 출마하는 장관이나 비서관이 줄을 잇는다. 이러니 공무원들이 앞장서 일하고 싶겠나.
관행처럼 업무지시를 처리했다가 조사를 받고 처벌 위험에 놓인 사례도 숱하다. 이 때문에 눈치없이 열심히 일하다간 정권이 바뀌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전 정부에서 일깨나 한 공무원 가운데 감사원 감사를 받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윤석열정부에서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은 감사원과 검찰 일부밖에 없다는 냉소적인 얘기도 나돈다. 사고는 장관이 쳐도 뒷수습하는 일은 하위직 공무원들 몫이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패배의 책임은 선수가 아닌 감독이 지는 게 상례다.
대통령의 ‘깨알지시’도 공무원의 일할 의욕을 꺾는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업무보고 때의 장황한 지시 발언은 ‘임금이 모든 정사를 친히 보살핀다’는 의미의 만기친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때로는 교장 선생님 훈화처럼 느껴진다는 촌평까지 나온다. 세계잼버리대회 기간에는 무려 일곱번의 대통령 깨알지시가 내려왔다. ‘1만자 경찰 질타’ 발언은 전설적인 사례다.
공무원 사이에서는 “상급자가 회의를 주재하면 휴대전화 녹음버튼부터 눌러놓고 본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정권이 바뀌면 예상되는 불이익을 피하고자 물증을 남겨놓으려는 게 요즘 공무원의 생존방식이다. 중요한 개혁과제일수록 다음 정권에서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웬만하면 손대지 않으려는 풍조도 확산하고 있다고 한다.
국장이 과장에게 업무지시를 하면 과장은 지시받은 내용을 요약해 국장에게 이메일 같은 걸 보내 ‘지시 내용인데 맞습니까’라고 확인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윗사람의 지시로 업무를 수행한다는 증거를 남겨놓으려는 심산이다. 업무 지시를 받을 때 “이걸요? 제가요? 왜요?”와 같은 반응부터 보이는 젊은 세대의 ‘3요 공무원’이 부쩍 늘었다는 웃을 수 없는 얘기도 들린다.
대통령실이 적극 나서더라도 이런 분위기가 쉽게 변화하진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정권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적폐청산’으로 공무원이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하는 소가 매를 맞는다’는 속언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책임질 일도 없다’는 게 공무원 사회의 불문율이다. 검사 공무원 출신인 대통령이 공무원의 생리를 너무 모른다는 푸념도 나온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명패를 귀감으로 삼고 있다는 대통령이 생각해 볼 문제다. 공직자의 복지부동을 깨는 건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소신껏 해 보라’는 대통령의 자세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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