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관이 써 준 걸 이해하고 읽는 것조차 제대로 못한다고 손가락질 받는 우리네 국회의원은 지금도 이따금 눈에 띈다. 근대 의회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에서도 비리가 터지자 보좌관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둘러대는 국회의원들이 불과 몇 년 전까지 있었다. 2009년 권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하원의원들의 부당한 생활경비 청구내역을 폭로하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영국은 런던 지역구가 아닌 하원의원이 런던 주거 수당과 식비, 가구 구입비 등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청구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이를 악용해 50여 명의 의원이 청구 대상 주소지를 바꿔가며 복수의 주택에 대해 수당을 청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본인이 거주하지 않고 세를 놓아 임대 수익을 챙기면서 주거 수당을 청구한 사례도 들통 났다. 그러자 상당수 의원들이 “보좌관이 하라는 대로 한 것일 뿐”이라는 어이 없는 핑계를 끌어대 유권자들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이명박·박근혜정권 적폐청산·국정농단사건 수사과정에서는 대통령과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억울하다는 항변이 주류를 이룬다. 최근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수사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던 검사가 투신자살한 후 보수진영에서 동정 여론몰이 현상까지 나타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검사는 수사를 받으면서 주변인들에게 국정원에 파견돼 단순히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검사의 부인도 장례식장에서 “국정원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다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원통해 했다. 국군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 댓글공작 사건도 당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며 활동 내용을 일일이 보고했다는 증언이 재판과정에서 나왔다.
남재준·이병기·이병호 3명의 국정원장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요구로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고 밝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임을 부각했다. 누구 한 사람의 사과나 반성은 없다. 앞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의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불법 행위를 박 전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깨알같이 적어놓고 실행했다. 최순실 씨의 핵심측근이던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 역시 윗선인 최 씨의 지시로 이뤄졌으며, 자신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차 씨는 포스코 계열사인 포레카 강탈 미수 사건의 윗선을 박 전 대통령이라고 법정에서 지목했다.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도 “(이화여대 부정입학·삼성 승마지원 등) 모든 게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이게 범죄행위가 되는지 몰랐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적폐청산 대상 1호가 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한 교육부 관계자들도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너무 가혹하다고 하소연했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운전자가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단속경찰에게 해명했다는 일화를 연상시킨다.
뉘른베르크 나치 전범재판에서 나치정권 2인자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모든 피고인들이 잘못을 명령한 히틀러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들은 그저 집행했을 뿐이라던 희생자 코스프레를 보는 듯하다. 이들의 변명에서 죄의식이나 역사 인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우려스러운 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프레임이 날이 갈수록 ‘과도한 정치보복’으로 몰고 가는 이상기류다. 검찰수사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겨냥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상 기류가 한층 고조되는 느낌을 준다. 댓글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이냐에서부터 윗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조직문화를 들먹이기도 한다. 그 상황에서는, 그 자리에 있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논리에 이르면 친일파 청산 때와 너무나 흡사하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거나 ‘누구에게나 일말의 악이 있다’는 물타기 주장도 마찬가지다. 조직이 시키는 일이라면 위법이더라도 결단코 해야 한다는 그릇된 충성심이 나라를 망쳐왔는데도 말이다.
너희라고 정권이 끝나면 보복을 당하지 않을 것 같으냐는 협박에 주춤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적폐의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른 시일 안에 모든 적폐청산을 끝내겠다는 과욕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분야의 적폐이건 요란하지 않게 흔들림 없이 척결하면서 후속조치를 더해 가면 된다. 백서도 만들어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자료로 삼아야만 적폐와 작별할 수 있다. 적폐청산의 제도화와 체계화가 요긴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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