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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와 적폐청산

 탄핵심판의 대통령 파면 결정은 누가 뭐래도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다. 헌법재판소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결정문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 있다는 헌법정신을 재확인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법 위에 설 수 없다는 준엄한 선언이다. 탄핵무효를 외치는 극소수 불복자들의 언사와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일각의 물타기식 평가는 비극적인 헌정사에 대한 조사(弔詞)일 뿐이다.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내린 파면 결정은 대통령의 법 위반 정도가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중대한 탄핵 사유에 해당함을 명증한다. 박사모와 진박들이 우격다짐으로 주장하는 ‘죄 없는 대통령을 쫓아내기 위한 종북 빨갱이들의 음모’는 더욱 아님을 헌법재판소가 보여줬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하여 파면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안창호 재판관의 보충의견이 그것이다.


 이는 헌법적 가치가 이념보다 우선함을 역설한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과 이념을 지닌 국민이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고 따라야하는 전범(典範)이 헌법이라는 선언이었다. 헌재의 탄핵선고 직후 나온 긴급 여론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리얼 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6%가 헌재의 탄핵 결정에 대해 “잘했다”고 답했다. ‘잘했다’ ‘못했다’를 넘어서 “헌재 결정에 승복한다”는 응답은 무려 92%에 이르렀다.

                                                                                        


 실제로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이념이나 신념의 체계는 아니다. 민주주의는 왕이나 귀족의 권력이 아니라 민중(시민)권력을 뜻한다. 역사적 탄핵 결정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시민의 조직된 힘, 촛불로 이루어낸 열매다.


 대통령 파면은 임기 내내 국민을 깔보고 권력을 사유화해 국가의 바탕을 흔들어놓은 죄과에 대한 업보나 다름없다. 대통령과 지지자들은 헌재의 결정을 국민의 명령으로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12일 저녁 청와대를 떠나 서울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간 직후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며 사실상 헌재 판결 불복 의향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그가 국민에 대한 마지막 예의와 염치조차 걷어차 버렸다는 힐난의 목소리가 높다.

 

   자신의 입으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때 헌재 판결을 모두가 승복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역설했던 기억은 지워버린 듯하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한 발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랬다. “만약 헌재 판결에 불만스러운 사람들이 또 반대시위를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법치가 근본부터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보수 기득권의 상징’이자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가 민주화 시대의 덕목과 상식조차 갖추지 못한 채 대통령이 된 건 대한민국의 불행이었다. 대통령 박근혜의 퇴장은 무너진 민주주의의 기둥을 다시 세워야 함을 의미한다. 애써 떨쳐버리지 못한 박정희 신화와 패러다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70년 넘게 끊어버리지 못한 낡은 체제를 청산하는 작업을 결연하게 시작할 때다. 찢긴 민심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국민통합’을 무시할 수 없지만, 선결과제가 적폐청산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해방 직후 친일청산에 실패한 대가가 오늘날 엄청난 기회비용으로 돌아온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적폐청산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무분별한 온정주의와 이념논쟁 촉발이다. 한편에서는 탄핵 국면에서 상처 입은 국민의 통합을 위해 온정주의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도 불구속을 원칙으로 해 지지자들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법적 엄벌은 단순히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제 청산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비정상적인 상황을 만든 부역자와 시스템에 대한 청산작업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온정주의가 득세하면 다시는 기회를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절망을 안길 게 뻔하다.  적폐청산 과정에서 저항세력이 이념의 잣대로 딴죽을 걸 개연성도 높아 보인다. 보수진영도 막무가내로 달려들지 모를 극우세력과 결별하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당장 표심을 얻는데 만 급급하면 개혁도 실패할 게 틀림없다. 소수의견도 존중하고 포용하되 적폐를 말끔히 청산하는 원칙 있는 개혁이 절실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