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라피의 발명/린 헌트 엮음 조한욱 옮김 책세상 (1996년)
잘 하는 것도 많지만 달갑잖은 세계 1위를 많이 보유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자살률, 저출산율, 고령화진행률, 이혼율,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수에서 모두 세계 정상을 달린다. 여기에 추가해야 할 게 ‘포르노그라피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 나라’라는 불명예다. 2년여 전의 보도이지만 영국 BBC방송이 발행하는 잡지 <포커스>는 한국을 1인당 포르노그라피에 지출하는 비용이 가장 많은 국가 1위에 올려놓았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7가지 죄악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고 있는지 국가별 순위를 매긴 결과다. 한국은 색욕, 식욕, 탐욕, 나태, 분노, 시기, 오만 가운데 색욕 부분 1위에 등극한 것이다.
포르노그라피는 인간 본능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관음의 욕구가 배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얻어낸 부산물의 하나다. 사진,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스마트폰의 발명이 현대인들의 무한 욕구를 부추긴다. 첨단 매체가 등장하기 전에는 어땠을까. 린 헌트 미국 펜실베니아대 석좌교수를 비롯한 9명의 역사학자·문화사가들은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원제 The invention of pornography)에서 그 기원을 풀어내 준다. ‘외설성과 현대성의 기원, 1500∼1800’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지은이들은 르네상스 시대와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는 동안 유럽의 관음문화를 속속들이 들여다본다. 헌트는 “근세 초의 포르노그라피는 자유사상과 이단, 과학과 자연철학, 절대주의적 정치권력에 대한 공격 등 현대문화 발생기의 가장 중요한 성격을 보여준다”고 책의 의미를 설명한다.
1991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열린, 같은 이름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됐던 논문을 정리해 엮은 책이어서 외설성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16∼18세기 도색화 50여 점을 곁들인데다 당시의 야한 문학작품을 소개하면서 노골적인 표현이나 성적 용어를 그대로 인용한 경우도 더러 있긴 하다. 하지만 21세기의 시각에서 보면 한참 낡은 표현수단에 불과하다. 당시 프르노그라피는 그림, 삽화, 소설, 시 같은 것에 한정돼 있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의 포르노그라피가 대부분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세계 민주주의의 싹이 된 프랑스 혁명에도 포르노그라피가 막중한 역할을 했다고 대표저자 격인 헌트는 분석한다. 음란 저작물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요 원인은 아니겠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그라피가 만연돼 있는 상황에서 한층 광범한 사회 위기의 전조를 읽었다고 그는 단언한다.
공격의 대상이 된 중심인물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 16세의 왕비 앙투아네트의 성적 비행을 열거한 포르노 팸플릿은 왕위 계승자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토록 해 왕권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혁명파들은 “왕비가 낳은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왕권실추에 결정타를 가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시동생인 다르투아백작 폴리냑공작부인과 집단혼음을 하는 내용을 그린 ‘취한 오스트리아여인’은 당국의 집중단속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왕비가 시종과 정사를 벌이는 포르노그라피는 왕비의 육체에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국가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환상을 일으켜 민주주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1740년대와 1790년대 사이에 프랑스의 포르노그라피는 더욱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군주제에 대한 비판이 신랄해져 포르노그라피 팸플릿은 성직자, 궁정, 심지어 국왕 루이 15세까지 공격을 감행했다. 헌트는 그런 점 때문에 ‘포르노그라피와 혁명은 불편한 동침자’로 묘사한다.
<원서>
프랑스 혁명과 포르노그라피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이 책은 전한다. 주도적인 혁명가 가운데 최소한 두 사람-미라보와 생쥐스트-은 혁명 이전에 포르노그라피를 쓴 일이 있었고, 사드 후작으로 대표되는 주도적 포르노그라피 작가 중 여러 사람은 혁명에 직접 참여했다. 정치적 동기를 지니고 있던 포르노그라피는 앙시엥 레짐의 정통성을 침해함으로써 혁명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됐다. 1789년 언론이 자유를 얻은 이후 혁명정부는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정치적 포르노그라피는 16세기의 아레티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나긴 계보를 지니고 있고, 프랑스 앙시엥 레짐의 마지막 몇 십년간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의 다른 지역에서도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의 근세 초 유럽에서 포르노그라피는 흔히 성의 충격을 이용해 종교적·정치적 권위를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다고 헌트는 진단한다. 헌트는 포르노그라피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작가, 예술가, 판화가들의 진영과 첩자, 경찰, 성직자, 국가관리 진영 사이의 충돌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적·문화적 의미는 그것이 사고와 표현, 통제의 범주로 등장하게 된 사실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발명’이란 책 제목을 붙인 듯하다.
포르노그라피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특이하고 역설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16, 17세기의 포르노그라피는 대체로 기질상 자유사상을 가진 도시귀족이었던 남성 엘리트 독자들을 위해 쓰였다. 쓴 사람도 대부분 남성이었다. 18세기에는 포르노그래피의 주제가 민주주의적 담론에 침투함으로써 독자층이 확대되었고, 프랑스 혁명에 의해 더 큰 자극을 받으며 전개되었다.
루이 14세의 치세기간 포르노그라피와 음란물은 교회와 국가의 권위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난이 심했던 루이 14세 말년에, 신교도들과 종교적 광신도들이 감옥을 채웠을 때 포르노그라피는 대안적 왕국이나 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국가의 기존 권위의 부패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더욱 빈번했다. 로버트 단튼 같은 학자들은 근세 초 프랑스에서 정치, 포르노그라피, 철학이 이른바 ‘세속적 삼위일체’를 이루며 존재했다고 본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야 포르노그라피는 서서히 성적 자극이라는 기능만을 근거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대표 저자 린 헌트>
프랑스의 전통이 유럽의 포르노그라피 소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데 비해, 18세기의 영국에는 20세기의 독자들이 노골적으로 포르노그라피라고 인정할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랜돌프 트럼백 뉴욕시립대 교수는 설명한다. 옥스퍼드영어사전에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라는 단어가 최초로 수록된 게 1857년의 일이다.
다만 20세기 장르의 선구자로 평가받을만한 존 클렐런드의 <패니 힐>은 사실상 유일하게 확고한 포르노그라피의 사례라고 한다. 정식 제목이 <쾌락의 여성의 회고록>인 <패니 힐>은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악명 높고 가장 많이 읽힌 포르노그라피 소설로 평가받는다. 이 소설은 서술적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해 대단한 성적 흥분을 이끌어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클렐런드는 기독교적 금욕주의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성적 쾌락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이 작품의 목적은 뚜렷하게 정치적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외려 풍자적이지도 해학적이지도 않은 맥락 속에서 독자들을 성적으로 도발시키려는 목적을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이웃나라 네덜란드는 포르노그라피의 정치화나 종교적 무기화가 없었던 게 특이하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는 철학자나 정치적 작가들이 서부 유럽의 대다수 국가보다 큰 자유를 누렸다. 이 때문에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포르노그라피 같은 수단을 쓰지 않아도 됐다고 위트레히트 대학의 베이난트 W. 메인하르트 교수는 분석하고 있다. 생생하고 포르노그라피적으로 대단히 발전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림의 성격과 비교할 때 네덜란드 그림은 단조롭고 정숙하기까지 하다. 서적의 삽화도 마찬가지로 온건했다. 정치적·철학적 논의에서 포르노그라피가 배제됐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에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정치적·사회적·종교적 구조다. 네덜란드에는 교리나 도덕에 관한 특별한 권한을 지니는 궁정, 국왕, 특권 귀족, 국가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18세기 영국에서도 고도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자생적인 포르노그라피의 분출을 막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생적인 포르노그라피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이후, 대중 정치가 출현한 시기다. 이는 포르노그라피와 민주주의 사이의 상관관계를 시사해준다.
최초의 현대적인 포르노그라피 작품으로 전문가들에 의해 공인된 것은 16세기 이탈리아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1492-1557)의 소설 <논리>다. 나이 들고 경험 많은 창녀와 젊고 순진한 창녀가 성행위에 관해 사실적이고 풍자적인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논리>는 17세기 포르노그라피 산문의 전범이 됐다.
‘포르노그라프’라는 단어는 원래 매춘에 관련된 저작을 지칭하며, 1769년 브르타뉴의 레스티프가 처음 사용했다고 헌트 교수는 전한다. 1806년에 이르러 이 용어는 사회 질서에 혼란을 초래하고 미풍양속을 위반하는 저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같은 해 금서사전을 편찬한 프랑스인은 포르노그라피를 종교적·정치적 이유에 대립되는 도덕적 이유로 억압되는 책의 범주라고 정의했다. 영국의 경우 19세기 후반까지 포르노그라피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포르노그라피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포르노그라피는 원래 그리스어의 매춘부(porne)와 글쓰기(graphos)에서 유래된 단어로 ‘매춘부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포르노그라피는 그리스인이 창출한 하나의 훌륭한 문학형 시인 셈이다. 포르노그라피란 말은 실제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면서 그 경계 또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가변한다. 포터 스튜어트 미국 연방대법관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외설에 대한 정의를 내릴 생각도 없으며 그것이 지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보면 안다.” 196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음란한 하드코어 포르노그라피의 판단기준을 딱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던 때 했던 명언이다.
근세 초기에도 포르노그라피라고 여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선도 정치적으로 설정됐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경계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외설적이라는 단어에 대한 18세기의 정의는 현대의 정의와 현저하게 다르지 않지만 좀 더 모호했다고 뤼시엔느 프라미에-마쥐르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는 설명한다. <백과전서>에서 ‘외설적’이라는 단어는 “정숙한 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었다고 한다.
<언어의 폭력>을 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표적 저항작가는 J. M. 코에체는 에로틱 문화현상 가운데 외설물과 포르노그라피를 구분한다. 외설물은 사회의 도덕감각을 도발함으로써 그 반동력을 상품화하는 주변현상에 불과한 것이어서 도덕적 판단의 여지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포르노그라피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기존의 터부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미를 가진 행위다. 그 예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든다. 그렇지만 시장에 나온 포르노그라피는 단순한 외설물로 타락하는 경향을 지닌다. 포르노그라피가 정치적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욕망의 충족을 약속해 주기만 해야지 욕망을 충족시키려 나서서는 안 된다고 코에체는 선을 긋는다.
포르노그라피의 정치화에서 확실한 경계선을 그은 사람은 사드 후작이었다고 한다. 사드는 현대 포르노그라피의 거의 모든 주제를 예행 연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포르노그라피의 효과를 목록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전공이었다. 강간, 근친 상간, 존속 살해, 신성 모독, 남색과 여성 동성애, 어린이 추행, 그리고 거의 모든 형태의 가공할 고문과 살해가 사드 저서의 성적 도발과 관련이 있었다. 사디즘(가학성 변태성욕)이란 용어는 그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그는 포르노그라피가 지니는 정치적·사회적 전복 가능성을 극한까지 몰아갔고, 그로 말미암아 비정치적 장르의 현대 포르노그라피를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
포르노그라피의 확산에는 인쇄술의 발달이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영상물의 발전이 또 다른 도약 단계를 만들어 준 것에 비견될 만큼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접할 수 있게 되고, 검열과 통제의 필요성이 촉발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포르노그라피는 처음부터 정치적 비판은 물론 새로운 과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포르노그라피는 16세기에 최초로 출현했고, 인쇄문화와 동시에 발전했다. 포르노그라피가 인쇄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였던 소설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설을 출판하지 않았던 국가에서는 포르노그라피도 거의 출현하지 않았다. <패니 힐>은 감상적 소설과 포르노그라피의 혼합형이다.
또 다른 저자인 과학사가 마거릿 C. 제이콥은 포르노그라피의 영감은 처음 자연주의적인 성격에서 출발해 철저하게 물질주의적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자연주의는 성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 성욕은 자연발생적이라는 관점을 제시해 포르노그라피를 자연철학에 뿌리를 두게 했다. 물질주의 철학의 등장 이후 포르노그라피에서는 자유사상을 지닌 창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며, 그들은 단순한 쾌락의 제공자가 아니라 스스로 성적 쾌락을 즐기는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 계몽사상가 디드로는 포르노그라피를 썼고, 그것 때문에 1749년 투옥되기도 했다. 18세기의 문학과 화화에서 에로틱 요소가 부활한 것은 계몽주의의 자연관에 기인한 것이다. 그 논리는 이렇다. 성욕은 자연적인 것이다. 성욕의 억제는 인위적이며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열정은 이 세계에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성적 계몽주의는 계몽사상 자체의 일부다.
포르노그라피는 대체로 남성 저자에 의해 만들어져 남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여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남성중심주의의 산물이다. 관음증과 여성의 물건화가 복합적으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형제애는 사회 평준화라는 의미에서 민주적이었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 대부분 남성들만을 위한 평준화였다.
포르노그라피가 반드시 정치적 비판이나 전복을 위한 목적으로만 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이윤을 챙기기에 편리한 매체이기도 했다. 정치적 포르노그라피의 정점은 1790년이었고, 그 이후 새로운 작품의 숫자는 1793년 이후 급격히 감소한다.
사드와 브르타뉴의 레스티프처럼 잘 알려진 작가들을 제외하면 포르노그라피 작품을 누가 썼고 출판했으며 배포했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창녀는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서 특별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라고 캐스린 노버그 UCLA교수는 평가한다. 최초의 포르노그라피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아레티노의 <논리>는 두 명의 창녀가 나누는 대화이다. 가장 중요하고 지속력 있는 포르노그라피 텍스트 중 하나인 <패니 힐>의 여주인공도 창녀다. 창녀는 포르노그라피 세계의 극치인 사드 후작의 세계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의 가장 긴 소설 <쥘리에트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창녀의 방탕함이다. 르네상스부터 프랑수 혁명에 이르기까지 창녀들은 외설 문학을 채우고 있다. <방황하는 창녀>에서 <패니 힐>까지, <마르고>에서 <쥘리에트>에 이르기까지 창녀의 수다 자체가 서구 포르노그라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 시대의 성의 정치학은 포르노그라피 작가가 창녀를 희생자로 그리는가 아니면, 약탈자로 그리는가에 따라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노버그는 주장한다. ‘자유사상의 창녀’와 ‘정숙한 창녀’ 개념이 그것이다. 정숙한 창녀는 1760년경에 태어났다. 최대의 옹호자는 브르타뉴의 레스티프이다. 레스티프와 그 후의 많은 작가들에게 창녀는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다. 그녀는 불운한 희생자이고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자식이며, 몸은 병들었고 때로는 마음까지 병들었으며 남성과 사회의 가학증을 견뎌야 하는 운명이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물질주의적 철학에 빠져 있고 감각적 쾌락, 특히 다양한 쾌락에 편안함을 느끼던 로코코 시대의 산물이다. 정숙한 창녀와 달리 그녀는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알지 못하며 검열관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자신의 직업을 비하시키지 않는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18세기의 다양한 문학 작품에 등장한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남성의 성욕을 반영하는 것이며, 남성의 육욕을 드러내주는 거울이다.
린 헌트의 다른 저작 <인권의 발명>
이 책은 포르노그라피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이자 일종의 미시사다. 포르노그라피가 지니는 다층위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 책이다. 우선 포르노그라피의 외설성이 현대성의 기원 가운데 하나라는 가설을 입증하는 의미가 크다. 이 책의 특징은 포르노그라피의 내용 분석이 아니라, 만들어져 확산되고 해석되며 검열되는 방식에 비중을 둔 점이다. 당시의 성풍속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까치)나 파울 프리샤우어의 <세계풍속사>(까치)와 달리 포르노그라피가 형성된 역사와 개념에 대한 논의를 집중시키고 있는 점이 다르다. 당시의 생생한 포르노그라피 도판을 풍부하게 수록한 공통점은 엿보인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도출한 개념과 문학비평을 활용해 포르노그라피의 언어가 지니는 외설성의 문제를 고찰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철학·문학적 측면에서 포르노그라피에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현대 포르노그라피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포르노그라피 논쟁에 충실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줄만하다.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발간하는 격주간지 <기획회의> 332호(2012년11월20일자)에 실린 것을 많이 늘려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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