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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시리아의 광주, 하마의 비극

하마는 시리아의 광주(光州)다. 아니, 민주화를 위해 흘린 피의 양만 따지면 광주는 하마에 명함을 내밀기조차 어렵다. 하마는 광주보다 100배에 가까운 피를 더 흘렸다.
공식 집계로 200여명의 목숨을 잃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982년 하마에서는 무장봉기한 2만여 명의 시민이 보안군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 당시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탱크와 대포는 물론 전투기까지 동원해 ‘무슬림 형제단’이 장악한 하마를 휩쓸었다. 도시 전체가 폐허에 이를 지경이었다.

                                           


 
하마에 뼈아픈 과거가 재현되고 있다. 이번엔 학살의 주인공이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시위를 주도한 핵심은 30년 전 희생자들의 후손이나 친인척들이다. 최근 시리아 정부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140명 이상의 하마 시민이 숨졌다고 인권단체들은 전한다. 한 맺힌 시민들은 이번엔 결단코 과거의 비극에 머물지 않겠다면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사실 올해 시위는 하마에 그치지 않고 시리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 예멘의 민중 봉기에 힘입어 5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시리아의 민주화 시위로 이미 1천700여명이 숨지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고 인권단체는 추산한다.
아사드는 지난 3월 중순 민주화 시위가 촉발한 이래 하마에 대한 무력 탄압만은 자제해왔다. 30년 전의 학살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심각해지자 아사드는 강경 진압을 선택했다. 아사드는 이슬람 금식 성월(聖月)인 라마단 기간임에도 강압을 멈추지 않고 있다. 48년간 지속된 비상사태를 지난 4월 해제했으나 반정부 시위는 그칠 줄 모른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는 국면이지만 국제사회는 말로만 비난할 뿐 뾰족한 압력수단을 동원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난마처럼 얽힌 중동정치와 시리아의 특수 상황 탓이 크다.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는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잔혹한 권위주의 통치로 정치생명을 이어왔다. 이른바 비이슬람적인 ‘피를 흘리는 자, 아불 압바스’ 방식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처음으로 야만적인 통치를 행했던 권위주의 지도자가 바그다드에서 압바스 왕조를 연 아불 압바스 알 사파(750~754)다. 그가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 ‘피 흘리는 자, 아불 압바스’다.

 
수니파가 대종을 이루고 있는 시리아에서 40년이 넘는 아사드 일가의 장기집권을 뒷받침하는 세력은 인구의 12%에 불과한 알라위파이다. 74%에 이르는 수니파 국민들은 절대다수임에도 시아파의 소수 분파인 알라위파의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했다.
중동에선 이라크·레바논·예멘처럼 통치자들이 정통성이 없는데다 사회가 종교·부족·지역감정으로 사분오열돼 있어 군부를 동원한 강권정치가 정권유지의 수단이었다.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 시절에 이런 풍자 우스개가 돌았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한 측근이 아사드에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각하는 99.7%의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이는 시리아인의 1% 중 10분의 3만이 각하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더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아사드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들의 명단!”
 

                                                    


 
아사드 부자의 정권유지 수단으로는 강도 높은 반이스라엘·반미 대외정책도 유효했다. 소련 해체로 인한 탈냉전 이후에도 국민통제 수단으로 더없이 멋진 카드였다.
이 때문에 시리아는 종종 북한과 한 묶음으로 엮여 들어간다. 시리아의 부자 권력승계와 군부를 동원한 철권통치는 북한과 판박이여서다. 자연히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겐 눈엣가시일수 밖에 없다. 시리아는 반이스라엘 정책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바람에 서방 국가들에게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서방 입장에선 이슬람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무슬림형제단’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도 대안이 아니라는 데 시리아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하마는 ‘무슬림 형제단’의 시리아 지부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이웃 아랍 국가들도 시리아의 불길이 자기 나라에 옮겨 붙지 않을까 그저 두려울 뿐이다.

 
아랍에는 ‘폭정 60년이 무정부 상태의 하루보다 낫다’는 속담이 전해 내려온다. 기본적으로 상업사회인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이 혼란을 두려워했던 분위기를 반영하는 말이다.
위로부터 통제가 사라져 모든 부족과 종교 분파가 서로 대립하는 사태가 무엇보다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극도로 잔인하고 정통성 없는 전제군주라도 질서 유지만 해준다면 끝없는 내란으로 인해 약탈에 시달리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왔다.

 
얼마 전엔 하마의 한 청년이 이런 노래를 부르다 죽어갔다. “이봐, 바샤르, 거짓말쟁이. 저주받을 당신과 당신의 연설! 자유가 목전에 왔으니, 꺼져버려!”

시리아 민주화 시위의 구심점인 하마에는 아사드를 비판하는 이 노래가 급속하게 번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시리아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다. 모두들 입으로만 걱정해 주는 ‘하마의 피눈물’은 뒷전으로 밀려버릴 것만 같아 안타깝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46세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이다.
의학도였던 바샤르는 당초 정치가가 될 꿈과 열망조차 없었다. 아버지가 바샤르의 형 바실 알-아사드를 미래의 대통령으로 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샤르는 1988년 다마스쿠스대학교에서 안과학을 전공한 뒤 안과의사가 되기 위해 1992년 런던에 유학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의사로 놓아두지 않았다. 1994년 형 바실이 교통사고로 죽는 바람에 귀국해 군에 입대했다. 아버지의 새로운 후계자로 커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마스쿠스 북부에 있는 홈스의 군사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1999년 1월 대령으로 승진했다. 동생의 권력 기반이었던 공화국 수비대의 실질적인 지휘권도 장악했다. 바샤르는 2000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집권 바트당과 군의 지도자로 임명됐다. 그 뒤 투표자의 97.2%라는 엄청난 지지율(?)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2007년 5월 경쟁자 없이 치러진 국민 투표에서는 97.6%의 지지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됐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 계열의 주간지 <퍼레이드>는 그를 세계 최악의 독재자 12위로 선정한 바 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분량을 늘려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