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공자,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90돌

중국 근·현대사는 공자 수난사로 점철됐다. 중국 역사상 가장 상징적 인물인 공자는 세 번에 걸쳐 집단적 타도대상에 오른다. 모두 근대화 과정에서다. 태평천국, 5·4운동, 문화대혁명이 그 때다.
첫 번째 파도인 태평천국 당시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을 숭앙하는 백성들은 공자를 ‘요마’(妖魔)라고 타매하며 공자 사당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공자의 목주(위패), 그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열 사람인 십철(十哲)의 사당도 보이는 대로 파괴하고 불태웠다. 백성을 탄압하고 나라를 망치는 것이 유교와 부패한 관리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남녀평등과 농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게 그들의 이상이었다.


중국 현대사의 시발점이 된 5·4운동 때는 ‘공자 상점을 타도하라!’ ‘공자주의를 쳐부수자’가 주요 슬로건 가운데 하나였다. 반전통·반봉건 사상혁명은 도덕문화의 근간인 공자와 유교에 대한 비판운동이 핵심이었다. 공자가 가장 혹독하게 비판받은 것은 문화대혁명 때였다.
마오쩌둥을 추앙하던 홍위병들은 공자의 무덤까지 파헤쳐 확실히 죽어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정도였다. 공자는 마오쩌둥의 후계자 린뱌오와 함께 끌려나와 또 모욕을 당했다. 이른바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공자를 때려잡는 무기는 태평천국의 경우 기독교였고, 5·4운동 때는 민주주의와 과학이었다. 문화대혁명 때의 무기는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랬던 공자가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과 더불어 복권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때는 장엄한 의식으로 공자의 부활을 전 세계에 화려무비하게 알렸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세계 96개국 322곳에 ‘공자학원’을 세워 공자의 세계화와 중국문화 알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를 1000곳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중국이 ‘소프트 파워’를 키워 서구 문화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자사상을 활용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를 성역화하고,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 ‘공자’를 만든 것도 같은 취지다.


하이라이트는 올 1월초 마오쩌둥이 지배하던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공자동상이 들어섰던 일이다. 공자와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에서 마주보게 된 것은 매우 ‘상징적 사건’이었다.
공자의 부활은 안으로는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인민, 나라 밖으로는 중화제일주의를 겨냥했다. 다목적 포석에는 때마침 중동에서 불어온 재스민 혁명 방어책으로도 활용하려는 의도까지 깔렸다. 지난날 백성들이 황제를 천자로 떠받들고, 반란과 혁명을 막으려는 통치수단으로 공자와 유학사상을 이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2008년 이후 미국이 금융위기로 좌초하고 다른 서방사회까지 타격을 입게 되자 중국은 딴 생각을 품게 됐다. 서구모델의 한계가 드러난 만큼 세계질서의 지배이념도 중국식 모델로 바꾸겠다는 의중이었다. 공자의 본격적 부활은 이 같은 복합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톈안먼 광장에서 철거된 공자상>

 
하지만 새로운 문화 상징이었던 공자의 동상은 100일도 안 돼 광장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5·4운동 92주년을 코앞에 둔 미묘한 시기에 반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중국 공산당 이론지 ‘구시’(求是)는 당시 ‘잘 가요, 공자’라는 칼럼을 실어 켯속을 드러내 보였다. 이 칼럼은 “공자와 유가사상의 역사적 위치에 관해 중국에서는 5.4운동 이래 일찌감치 결론이 나 있다”며 “중국의 2천년 넘는 역사에서 유가사상은 줄곧 봉건통치질서 옹호자의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역대 왕조의 주기적 멸망을 구제하지 못했고 근대 서방열강의 함대와 대포를 저지하지 못했다”며 공자를 비판했다.
칼럼은 이어 “중국은 5·4 신문화운동으로 공자를 전복시켜 민주와 과학의 신국면을 개창했다”며 “중국혁명의 실천은 오로지 마르크스·레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이론만이 중국을 진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칼럼은 “100일전 공자상이 천안문 광장에 섰던 것은 ‘소수인’이 공자를 만방의 선생으로 떠받친 것이며 그럴듯하게 국민의 조아림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인민의 사상을 마취하고 구속하였다”고 꼬집었다. 게다가 “공자는 만능의 구세주가 아니다. 유가사상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정신문명 건설을 추진할 수 없으며 봉건등급제도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조화안정을 위호할 수 없고 전통 도덕적 기준은 결코 사회 도덕위기를 구제하는 치세영약이 아니다”고 반격했다. 공자와 유교의 현실적 위상이 높아지자 불협화음이 밖으로 새어나온 것이다.


7월1일 중국 공산당 창당 90돌을 앞에 두고는 ‘공산당 만세’와 마오쩌둥의 붉은 물결로 온통 뒤덮인 걸 보면 공자의 부상은 우선멈춤에 이른 느낌을 준다.
공산당 창당 과정을 담은 홍색 블록버스터 ‘건당위업’을 필두로 창당 90돌을 기념해 개봉된 영화와 드라마만 수십 편에 이른다. 이 역시 심각해지는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처방전이 되리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경제적으론 세계 2강으로 도약했지만 날로 늘어만 가는 빈부격차로 말미암아 좌파사상 강화와 ‘마오쩌둥 정신 되살리기’가 다급해졌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홍색 캠페인에 열중하는 한편에서는 지방 관료의 부패와 애옥살이에 시달리는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근로자)과 소수민족의 격렬한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잇따랐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을 다시 꺼내 드느냐는 내부 비판이 나오는 것도 알만하다.


공자와 마오쩌둥의 널뛰기 현상은 중국의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보는 듯하다. 이는 중국 사회의 가치관 혼란과 갈등을 매우 상징적으로 방증한다. 공산당 일당지배체제가 경제 성장은 이뤄냈지만 사회변화의 열망을 견인해 내야하는 난제가 창당 100돌이라는 다음 고지를 향해 가는 그들 앞에 쌓여가고 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분량을 늘려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