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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국군 포로의 비극

1997-06-13
 
전쟁만큼 걸작을 낳는 문학적 소재도 드물게다. 최인훈을 우리 문단의 거목으로 평가받게 했던 「광장」 역시 6·25전쟁이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싶다. 주인공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때문에 시달림을 당하다 북으로 올라가 그곳 정치체제에 가담해 보지만 북의 「광장」, 남의 「밀실」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전쟁포로가 되어 제3국행을 택하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게 소설의 줄거리다. 이렇듯 전쟁과 포로는 바늘과 실에 비유될 만큼 숙명적인 관계다. 극적인 장면이라면 6년6개월동안 공산 베트남의 포로수용소에서 전기고문 등 엄청난 가혹행위를 당한 적이 있는 미 공군조종사 더글러스 피터슨이 베트남주재 미국대사로 부임한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지난달 9일의 일이다.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전쟁포로로는 프랑스의 사베앙이라는 대위가 첫 손가락에 꼽힐 법하다. 그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때 사라토프 수용소에 갇혀 지긋지긋한 생활을 하는 동안 누구하나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를 마땅히 챙겨야 할 조국 프랑스도 무관심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를 어여삐 여긴 수용소장의 「특별지시」로 수용소안의 한 모퉁이에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그는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다 포로가 된지 꼭 100년 하루만인 1912년 무려 144세란 나이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버금가는 일이 아직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 국방부가 파악하고 있는 미송환 국군포로는 무려 2만명 안팎에 이른다. 전사자들의 유해라도 송환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자극받지 않았으면 실상파악마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억류 국군포로들의 참상은 그곳에서 탈출한 조창호 중위의 증언이나 또다른 귀순자 이순옥씨의 수기 「꼬리없는 짐승들의 눈빛」에서 절절하게 나타난다. 60년대 중반까지 9차례나 확인을 거부한 북한당국이 지금이라고 우리의 요구에 응할지 의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의 불행을 더이상 방치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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