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03-16 |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시절 의회에 보낸 한 메시지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선거를 공명하게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은 반란도 진압할 수 있다』 선거수준이 국민의식과 정비례함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군사반란과 내란혐의를 받고 있는 12·12와 5·18 주역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놓고 「역사바로세우기」에 나선 가운데 15대 총선을 치를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국민주주의의 거울이 되다시피한 미국도 지난 92년 대통령선거와 의회의원선거를 계기로 한 차원 높은 선거문화를 일궈냈다. 상대후보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방이 당락의 주요한 변수가 돼왔던 선거풍토를 국민과 언론의 자성을 통해 이를 하찮은 종속변수로 바꿔놓은 것이다. 예비선거 초반부터 성추문에 시달렸던 빌 클린턴이 이같은 선거풍토변화가 없었던들 막강한 당시 대통령 조지 부시를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책대결보다 상대방 흠집내기로 쏠쏠한 재미를 봐 온 공화당의 결정적인 패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정적인 선거전략이 먹혀들지 않았던 데 있었다. 이같은 결과는 깨어난 유권자의식과 언론의 합작품이었음은 물론이다.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미국의 올 대선에서도 이런 추세가 이어져 21세기를 앞둔 정책비전이 주된 선거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싹이 트는 조짐을 보이고 있기는 하다. 15대총선과 관련한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 지난달에 비해 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층과 선거기피증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런 징후는 「악한 정치가는 역설적으로 투표하지 않은 선량한 시민에 의해서 선출된다」는 미국의 선거법언을 되새김질하게 한다. 정당지지도가 전반적으로 하락한 것은 바로 저급한 말싸움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화를 찾아볼 수 없는 후보군과 이념성향, 상대방 깎아내리기에만 여념이 없는 선거전을 지켜보고 있는 유권자들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비판은 하되 비방은 하지 않는다』고 다짐하면서도 3개 야당의 공세에 그렇게 참을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 선거대책위의장은 정치의 품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막상 당직자들과 후보들은 우이독경이다. 여야를 가릴 것없이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정책보다 지엽말절같은 자투리현안과 과거지향적인 문제로 선거전을 몰고 가는 게 승산이 한층 크다고 보기 때문인 것같다. 물론 선거자체가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유권자들의 감성에 좌우되는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H 먼로가 오래전에 꿰뚫은 바 있다. 『국민들은 분노에 투표하는 것이지 올바른 평가를 내려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은 어떤 것에 찬성해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반대하여 투표한다』 유권자의 귀책사유가 적지 않음을 꼬집은 말이다. 정책대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것은 이른바 「작문정치」에 기인하는 점도 적지 않다. 여야 모두 유사한 「장밋빛 약속」만 늘어놓아 현재 내놓은 공약들이 대부분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는 것을 전문가들은 물론 시정의 장삼이사도 꿰뚫어 보고 있다. 정책대결 부재는 건전한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것에서도 비롯된다. 신한국당의 이회창 선거대책위의장이 카운터파트가 아닌 야당총재들과 토론하겠다는 발상은 자신의 위상과 당의 입장만 생각할 뿐 애초부터 토론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에 다름아니다. 토론을 기피하는 여당의 속셈은 3개 야당과 3대 1로 싸운다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지난해 지방선거때 서울시장 후보들이 좋은 선례로 만든 TV토론을 사리에 맞지 않는 제의로 회피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 이번 총선이 여느 국회의원선거와는 달리 21세기를 예비하는 국민의 대표를 뽑는 미래지향적인 정책대결의 축제가 돼야한다는 점을 입후보자와 정당책임자는 물론 유권자 모두가 각인했으면 좋겠다. <정치부 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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