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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한글의 오늘에 얽힌 사연

2009.10.09 17:41  

영상의 힘이 탁월한 복제능력이라면 문자의 힘은 무한한 상상력이다. 문자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언급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인류는 공간 활동에서는 바퀴, 정신 활동에서는 문자라는 두 가지 발명에 의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오늘날 한글이 서양 알파벳을 비롯한 다른 문자를 능가한다는 사실은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이견이 없다. <총·균·쇠> <제3의 침팬지>의 저자인 퓰리처상 수상 진화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글은 독창성이 있고 기호·배합 등 효율성에서 각별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다”라고 격찬한다.

독일 함부르크대 베르너 삿세 교수는 “서양이 20세기에 비로소 완성한 음운이론을 세종대왕은 5세기나 앞서 체계화했다. 한글은 전통 철학과 과학이론이 결합된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칭송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펄 벅은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작품 <살아있는 갈대>에서 “한글은 24개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문자체계지만 자·모음을 조합하면 어떤 음성도 표기할 수 있다”고 호평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영국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맨은 <세계를 바꾼 알파벳>이란 책에서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모든 언어학자로부터 고전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한글은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 가운데 하나다”라고 찬탄했다. 몇 년 전 작고한 세계적인 언어학자 제임스 매콜리 시카고대 교수는 해마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해 수업 대신 동료 언어학자, 학생, 친지들을 초대해 한국 음식을 차려놓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기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상찬은 의례적인 게 결코 아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과학성, 합리성, 독창성, 편이성 등을 기준으로 세계 모든 문자의 순위를 매겨 진열해 놓은 적이 있다. 이 때 1위는 단연 한글이었다.

최경봉 원광대 교수 등 국어학자 3명이 함께 쓴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함께)은 이처럼 높이 평가받는 우리글에 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 안성맞춤인 대중서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까닭, 창제 직후 한글 보급에 얽힌 뒷얘기, 한글의 수난사 등 우리가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는 29가지 한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글 창제와 보급 과정에 참여한 학자들뿐만 아니라 훗날 문종이 된 세종의 세자, 정의공주의 협력설 같은 비화도 자세하게 들려준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이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세종의 애틋한 심정을 헤아려 아들 수양대군이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을 지었다는 사실도 흥미롭게 밝혀준다. 조선시대 한글 보급의 일등공신은 소설이란 점도 이채롭다. 영화 <음란서생>을 떠올리는 채수의 소설 <설공찬전> 필화사건에 얽힌 일화 역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돋보이는 것은 맹목적인 민족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엄밀하고도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한 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 만들어진 몽골의 파스파 문자가 한글의 운영방식에 미친 영향도 애국심과 거리를 두고 분석했다. 한글과 비슷한 인도 구자라트 문자, 일본 신대문자(神代文字),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고대 문자 ‘가림토’의 신빙성도 정밀하게 검증한다.

한글에 얽힌 사연들을 미주알고주알 알고 나면 정체불명의 한글 오용을 밥 먹듯이 하는 습속을 되돌아볼 게 자명하다.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자신들의 문자로 채택한 이유도 한결 선명하게 느낄 게다. 영어에 목을 매다시피 하는 우리는 차기 독일 외무장관으로 확실시되는 귀도 베스터벨레 자민당 대표가 독일에서 열리는 공식행사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뜻도 가슴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