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3-20 17:45:18ㅣ수정 : 2009-03-20 17:45:20
ㆍ재일동포 1세의 초상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이붕언 | 동아시아
재일동포 3세 사진작가 이붕언의 뇌리에는 불혹의 나이를 지날 무렵부터 마치 선문답이나 철학적 근본 물음과 같은 의문부호들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 걸까.’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렇잖아도 야마무라 도미히코(山村朋彦)라는 일본 이름을 써오던 그는 24살 때 본명인 이붕언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터였다. 어떤 불이익이든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앞섰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즈음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했던 말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두세 배 열심히 일해야 돼. 일본인들이 자고 있을 때도 노력해야 해. 그래야만 비로소 같은 씨름판에 올라갈 수 있어. 같은 씨름판에 올라가더라도 힘이 일본인과 비슷한 정도면 지게 되니까 모두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
그는 그런 기억을 아스라이 간직한 채 하늘나라에 계신 조부모, 선친을 만나는 기분으로 일본 전역에 살아 있는 재일동포 1세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났다. 일본열도 최북단 홋카이도의 외딴 산골에서부터 남쪽 끝자락 오키나와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5년여 동안 발품을 팔았다. 만난 이들은 대부분 80, 90줄에 접어들었고, 드물게 70대인 분들도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기억해 주지 않을지도 모를 100여명의 이름 없는 1세들이었다. 막노동자, 고물상, 택시운전사, 야키니쿠(불고기) 식당이나 전당포·작은 파친코 주인, 어부, 해녀 같은 직업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이붕언은 낯선 땅에서 잡초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억척같이 살아온 1세들이 사라지기 전에 뭔가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에서 카메라와 취재 노트를 들고 나섰다. 재일동포 1세들의 부고 소식이 점점 자주 들려왔고 남은 이들의 삶에도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다. 그들의 마지막 초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붕언의 마음이 바빠졌다.
많은 분들이 반려자를 잃고 홀로 살고 있었다.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대담을 거절하거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극구 사양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두 번의 여름방학 동안엔 3명의 어린 자녀를 동행시켰다. 이 여행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이들은 이해 못하지만 어른이 되면 깨달을 것이라는 희망과 더불어.
오래 전에 머리에 내린 서리, 세월의 무게를 절감하는 주름살이 역력한 사진과 함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재일동포 1세 아흔한 분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은 결정체가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이다. ‘디아스포라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면 어떨까.
기억의 저편을 떠올리는 재일동포 1세들이 공통적으로 맞닥뜨린 것은 가난과 차별, 편견이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막노동으로 살아야 했던 처지에서 가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냉대는 풀기 어려운 한으로 응어리졌다. 모든 ‘조선인’은 일본인들의 발에 밟히는 낙엽 같은 존재였다.
우리 나이로 아흔이 됐을 박수엽 할아버지는 차별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옛날에 ‘보리밥이 밥이냐, 정어리가 생선이냐’ ‘조선인이 인간이냐, 보리밥이 밥이냐’는 말이 있었다오. 조선인은 개나 매한가지로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선입견이 일본인들에게 있었지.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조선인을 싫어했는지 모르겠어.” 서무생 할머니는 망각으로 대응하려 했다. “차별받는 생각이 들 때는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어.”
1세들의 신산한 삶은 하나같이 닮은꼴이다. “도둑질과 살인 빼고는 다 해봤지. 조국이 통일이 될 때까지는 절대 눈 못 감아”(김태선 할머니), “제일 힘들 때 세상에 나왔어. 전쟁 전, 전쟁 중, 전쟁 후… 죄다 가시밭길이었어. 재일 3세 정도만 되었더라도 좋았을 텐데…”(김기선 할아버지).
고향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추스르기 힘든 애착이다. “나는 일본 흙은 절대 안 될 거요”(정현호 할아버지), “내 스스로 일본에 오긴 했지만, 자식들에게 내가 죽으면 고향에 묻어달라고 당부해 놓았소”(구한회 할아버지). 뼈를 일본인 아내가 묻힌 곳과 고향, 두 군데에다 묻어주길 바라는 김진하 할아버지처럼 삶의 현장에 집착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고국에 남겨진 부인과 일본인 아내를 동시에 가진 이중결혼의 애환도 대다수의 응어리였다. 뒤늦게 일본으로 건너온 부인이 겪어야 했던 속앓이는 당사자가 아니면 실감하기 어려운 고뇌였다.
때로는 비슷한 구술 내용이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각기 헤쳐나온 고생담에서는 진한 애환이 풍겨 나온다. 노인네들의 추억 나누기 정도로 여길지도 모르나 재일동포 1세들의 미시사라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재일동포 1세들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 기술 어느 곳에서도 소외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책에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 찾기를 주문하는 메시지도 오롯이 담겨 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 가운데 4분의 1 정도가 책이 나오는 동안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이 책의 소중함을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에는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작은 기여가 있었다. 번역자인 윤상인 한양대 교수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읽어보라며 건네준 두 권의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일본어판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소수자와 약자의 입장에서 작가로서 윤리의식을 다듬어온 만년의 오에 겐자부로가 재일동포 1세들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공명했던 시간들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1만8000원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이붕언 | 동아시아
재일동포 3세 사진작가 이붕언의 뇌리에는 불혹의 나이를 지날 무렵부터 마치 선문답이나 철학적 근본 물음과 같은 의문부호들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 걸까.’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렇잖아도 야마무라 도미히코(山村朋彦)라는 일본 이름을 써오던 그는 24살 때 본명인 이붕언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터였다. 어떤 불이익이든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앞섰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즈음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했던 말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두세 배 열심히 일해야 돼. 일본인들이 자고 있을 때도 노력해야 해. 그래야만 비로소 같은 씨름판에 올라갈 수 있어. 같은 씨름판에 올라가더라도 힘이 일본인과 비슷한 정도면 지게 되니까 모두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
그는 그런 기억을 아스라이 간직한 채 하늘나라에 계신 조부모, 선친을 만나는 기분으로 일본 전역에 살아 있는 재일동포 1세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났다. 일본열도 최북단 홋카이도의 외딴 산골에서부터 남쪽 끝자락 오키나와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5년여 동안 발품을 팔았다. 만난 이들은 대부분 80, 90줄에 접어들었고, 드물게 70대인 분들도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기억해 주지 않을지도 모를 100여명의 이름 없는 1세들이었다. 막노동자, 고물상, 택시운전사, 야키니쿠(불고기) 식당이나 전당포·작은 파친코 주인, 어부, 해녀 같은 직업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이붕언은 낯선 땅에서 잡초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억척같이 살아온 1세들이 사라지기 전에 뭔가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에서 카메라와 취재 노트를 들고 나섰다. 재일동포 1세들의 부고 소식이 점점 자주 들려왔고 남은 이들의 삶에도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다. 그들의 마지막 초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붕언의 마음이 바빠졌다.
많은 분들이 반려자를 잃고 홀로 살고 있었다.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대담을 거절하거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극구 사양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두 번의 여름방학 동안엔 3명의 어린 자녀를 동행시켰다. 이 여행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이들은 이해 못하지만 어른이 되면 깨달을 것이라는 희망과 더불어.
오래 전에 머리에 내린 서리, 세월의 무게를 절감하는 주름살이 역력한 사진과 함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재일동포 1세 아흔한 분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은 결정체가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이다. ‘디아스포라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면 어떨까.
기억의 저편을 떠올리는 재일동포 1세들이 공통적으로 맞닥뜨린 것은 가난과 차별, 편견이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막노동으로 살아야 했던 처지에서 가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냉대는 풀기 어려운 한으로 응어리졌다. 모든 ‘조선인’은 일본인들의 발에 밟히는 낙엽 같은 존재였다.
우리 나이로 아흔이 됐을 박수엽 할아버지는 차별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옛날에 ‘보리밥이 밥이냐, 정어리가 생선이냐’ ‘조선인이 인간이냐, 보리밥이 밥이냐’는 말이 있었다오. 조선인은 개나 매한가지로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선입견이 일본인들에게 있었지.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조선인을 싫어했는지 모르겠어.” 서무생 할머니는 망각으로 대응하려 했다. “차별받는 생각이 들 때는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어.”
1세들의 신산한 삶은 하나같이 닮은꼴이다. “도둑질과 살인 빼고는 다 해봤지. 조국이 통일이 될 때까지는 절대 눈 못 감아”(김태선 할머니), “제일 힘들 때 세상에 나왔어. 전쟁 전, 전쟁 중, 전쟁 후… 죄다 가시밭길이었어. 재일 3세 정도만 되었더라도 좋았을 텐데…”(김기선 할아버지).
고향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추스르기 힘든 애착이다. “나는 일본 흙은 절대 안 될 거요”(정현호 할아버지), “내 스스로 일본에 오긴 했지만, 자식들에게 내가 죽으면 고향에 묻어달라고 당부해 놓았소”(구한회 할아버지). 뼈를 일본인 아내가 묻힌 곳과 고향, 두 군데에다 묻어주길 바라는 김진하 할아버지처럼 삶의 현장에 집착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고국에 남겨진 부인과 일본인 아내를 동시에 가진 이중결혼의 애환도 대다수의 응어리였다. 뒤늦게 일본으로 건너온 부인이 겪어야 했던 속앓이는 당사자가 아니면 실감하기 어려운 고뇌였다.
때로는 비슷한 구술 내용이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각기 헤쳐나온 고생담에서는 진한 애환이 풍겨 나온다. 노인네들의 추억 나누기 정도로 여길지도 모르나 재일동포 1세들의 미시사라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재일동포 1세들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 기술 어느 곳에서도 소외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책에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 찾기를 주문하는 메시지도 오롯이 담겨 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 가운데 4분의 1 정도가 책이 나오는 동안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이 책의 소중함을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에는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작은 기여가 있었다. 번역자인 윤상인 한양대 교수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읽어보라며 건네준 두 권의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일본어판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소수자와 약자의 입장에서 작가로서 윤리의식을 다듬어온 만년의 오에 겐자부로가 재일동포 1세들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공명했던 시간들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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