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눈앞에 둔 1899년 광활한 북미 대륙 전역에서 철도가 건설되고 있을 때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베들레헴제철소에 40대 중반의 남성이 이 회사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전 세계에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실험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에게 하루 작업량을 할당한 뒤 이를 초과한 사람에게는 성과급을 주지만, 목표치를 채우지 못하거나 이를 거부한 사람은 해고하는 일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42킬로그램짜리 철봉을 화차에 실어 나르는 광경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은 하루 75톤의 선철을 짊어져 날랐다. 이는 이전 작업 수치의 여섯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틀간의 관찰 끝에 그는 공정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1명당 하루 45톤을 나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전 작업량의 세 배였다. 


 이 실험자는 적개심으로 가득 찬 노동자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경호원들의 호위까지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생산 공정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업무를 체계화하려는 집념어린 노력, 제조 공정에 관한 신개념 연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이 실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산 기법을 창안해 냈다. 그의 실험 결과는 ‘과학적 관리법’(원제 The Principle of Scientific Management)이란 책으로 탄생했다. 현대 경영학의 기틀을 만든 ‘테일러 시스템’은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의 이 같은 일념 덕분에 태어났다. 이 생산 기법으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가능해져 인류의 삶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다.

                                                                                             

 
 1911년 출간된 ‘과학적 관리법’은 작업의 흐름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해 생산성 극대화 원리를 정립한 최고의 경영학 고전이다. 이 같은 업적 때문에 테일러는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과학적 관리법은 노동자의 표준작업량을 과학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시간연구, 과업 달성을 자극하기 위한 차별적 성과급, 계획 부문과 현장감독 부문을 전문화한 관리시스템이다. 테일러는 과학적 관리법이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다양한 요소의 조합으로 구성된다고 역설한다. 주먹구구식 방법이 아닌 과학, 불화가 아닌 화합, 개인주의가 아닌 협업, 제한된 생산이 아닌 최대의 생산, 각 노동자가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번영을 이루게 하기 위한 노동자 개인의 능력 계발이 그것이다.


 과학적 관리법의 핵심은 시간과 동작 연구, 기록, 과업제도다. 시간·동작 연구는 한 번에 한사람의 작업자를 선발해 동작 하나하나의 시간을 측정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동작을 없애고 더 빠르게 생산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개발한다. 모든 것을 기록하고 메뉴얼로 만들어 한명의 노동자가 과도한 피곤을 느끼지 않고 최대로 작업할 수 있는 양을 뽑아낸다. 과업제도란 일한만큼 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 연구를 통해 직원을 엄선하고 그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과업 양을 제시하는 것이다. 책임자는 정확한 작업지시서와 관리를 통해 노동자가 과업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게 돕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지급한다. 테일러는 과업이 제대로 실행되고 관리될 수 있도록 기획부서와 기능별 직장제도를 고안했다.


 차별적 성과급제는 노동자가 과업을 달성했을 때는 높은 임금을 주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낮은 비율을 주는 임금제도였다. 이는 과업을 달성한 노동자가 이전에 비해 30~100퍼센트의 임금을 추가로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됐다. 테일러는 차별적 성과급제의 성패가 기계와 작업에 관한 정밀한 시간 연구를 통해 적절한 과업을 구성하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기획부는 이전에 숙련 노동자들이 가졌던 작업에 대한 지식을 관리자의 손으로 옮기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과학적 관리법의 기본 철학은 고용주와 노동자 모두 ‘최대 번영’을 누리는데 있다. ‘과학적 관리법’은 노사 양측에만 혜택이 돌아가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소비자와 사회 전체에 더 큰 이익이 돌아간다는 게 테일러의 생각이다.  


 작업시간도 오래 일하게 하는 것보다 제한된 시간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실험결과가 나왔다. 하루 10시간30분의 작업 시간을 10시간, 9시간30분, 9시간, 8시간30분으로 점차 단축하면서 임금은 동일하게 지불했을 때 산출량이 오히려 증가했다.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분명히 하고, 숙련도에 따라 공정에 투입하는 방식을 조정한 결과, 생산성이 높아졌다.

                                                                                             

                                                                             <프레드릭 테일러>


 테일러는 노동자의 태업을 막는 것이 생산성 향상의 지름길이라고 여겼다. 당시 노동자는 ‘기계의 생산량이 증가할수록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테일러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생산성 증대와 원가절감을 통해 제품가격을 떨어뜨려야 수요가 늘어나고 새로운 고용이 창출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과학적 관리법에는 네 가지 의무가 따른다. 첫째, 노동의 각 요소에 적용할 과학적 방법을 개발해 과거의 주먹구구식 방식을 대체해야 한다. 둘째, 과학적 원칙에 입각해 노동자들을 선발하고, 교육해야 한다. 셋째, 과학적 원칙을 상호 공감해야 한다. 넷째, 노사 간에 일과 책임을 균등하게 배분해야 한다.


 테일러 시스템은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주창한 ‘조립생산’과 결합하면서 대량생산 시대를 열어 시너지효과를 가져왔다. ‘과학적 관리법’은 미국 산업계를 점령한 데 이어 1920~30년대에 사회주의 소련으로도 수출됐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테일러리즘을 수용하면서 미국 전문가들을 소련으로 불러 들였다.
 테일러시스템은 기업과 산업계를 넘어 미국 사회 전체의 뉴 프런티어가 됐다. 미국이 모든 면에서 세계 최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요인의 하나였다. ‘디지털 테일러리즘’이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1905년 테일러의 경영 이론을 적용했던 타보 회사에서 한 기계노동자가 작업 중인 모습

              
 과학적 관리법이 미국에서 탄생한 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견해도 많다. ‘노동의 종말’ ‘유러피언 드림’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유럽인들은 종종 왜 미국인들이 살기 위해 일하기보다 일하기 위해 살까 하고 궁금해 한다. 그 대답은 효율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깊은 애착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인들은 효율성이 높을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워진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테일러 역시 어렸을 때부터 ‘효율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독특한 면을 보였다. 그는 학교까지 가는 길에 발걸음 수를 세어 가장 효율적인 보폭을 찾아낼 정도였다.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테일러는 무엇보다 게으른 것을 참지 못했다.

                               
 경영에 분업을 통한 전문화를 도입하고 과학적인 작업 방식을 정립한 테일러리즘은 막스 베버의 관료제와 더불어 기업조직과 경영활동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본원리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테일러는 ‘노동 과학의 뉴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테일러리즘이 기업경영에 ‘효율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혁명적 사고였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대 경영이론이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에서 시작됐다는 데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피터 드러커는 ‘찰스 다윈-카를 마르크스-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현대세계를 창조한 삼위일체’로 평가를 받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만약 이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마르크스는 빼고 테일러를 대신 넣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드러커는 “19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던 마르크스주의를 무너뜨린 것은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아닌 테일러리즘”이라고 단언했다.

                                                                                        

                                                                               <피터 드러커>


 그럼에도 테일러와 테일러시스템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인간노동을 기계화했다’는 비판을 거세게 받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은 테일러가 ‘노동자를 꼭두각시로 만들었다’고 화살을 퍼붓는다. 모두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목표 아래 노동자 하나하나를 높은 임금만을 주면 움직이는 기계부품처럼 취급해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학적 관리법이 노동자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주장에 대해 옹호론자들은 노동자들이 과업 수행 방식을 혁신하는 창의적인 제안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과학적 관리법은 현대 지식경영의 효시이기도 하다. 공정한 작업량을 설정하고 작업량에 따라 차별성과급을 주는 제도는 성과에 따른 연봉제를 추구하고 있는 현대기업이 추구하는 기본방향과도 일치한다.


 ‘훈련된 원숭이가 웬만한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단순 노동일지라도 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한 테일러의 표현은 테일러리즘 비판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때문에 테일러리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인본주의자들로부터 뭇매를 맞는다. 제3세계에서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돼 ‘유혈적 테일러주의’(Bloody Taylorism)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테일러는 노동조합으로부터도 욕을 먹었지만 자본가들을 ‘돼지들’이라고 부르는 등 그들의 탐욕에 대해서도 독설을 퍼부은 탓에 처음엔 노사 양쪽에 배척을 받았다. 테일러는 이 같은 비판을 잘 알고 있다면서 결국엔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드러커는 지적 역사에서 테일러보다 더 큰 영향을 준 인물이 거의 없었음에도 테일러만큼 의도적으로 왜곡된 사람도, 한결같이 잘못 인용되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개탄한다. 진보 진영과 노동계의 테일러에 대한 비판은 여전하지만, 경영진은 테일러 편을 든다. ‘과학적 관리법’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우리의 일터를 지배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대졸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덩달아 ‘디지털 테일러리즘’이 확산했다. 지식노동을 세분화·규격화·자동화하는 프로세스를 통해 비용을 줄이는 기법인 디지털 테일러리즘은 지식노동자의 재량과 가치를 줄인 반면, 기업의 통제력과 이윤은 크게 늘렸다. 기업이 값싼 노동자를 세계에서 손쉽게 충당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노동자는 배운 만큼 벌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5년 7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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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인간이 끊임없이 이상향을 갈망한 흔적은 동서양과 고금을 가리지 않고 발견된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파라다이스,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 그리스 신화의 엘리시움, 남아메리카 아마존 강변에 있다는 상상 속의 엘도라도, 성경 속의 에덴동산, 불교의 정토(淨土), 중국의 무릉도원이나 낙원,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설정된 티베트의 샹그릴라,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섬 라퓨타, 허균의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율도국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어떤 이는 이상향을 유토피아와 아르카디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의지가 실현되는 인공적 이상사회다. 이에 비해 아르카디아는 양떼, 산새, 들새와 초원에서 평화롭게 사는 목가적 이상향이다. 동양에서는 요순시대와 무릉도원이 각기 두 가지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상향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유토피아, 아르카디아, 코케인(Cockayne), 천년왕국(Millennium)이 그것이다. 코케인은 노동이나 수고를 하지 않아도 욕구가 충족되는 환락원이다. 가난한 농부들이 주로 꿈꾼 세상이다. 천년왕국은 신의 섭리가 실현되는 의롭고 선한 사회다. 그 옛날 유럽 민중이 동경하던 세상이다.

                                                                                                  


 이 가운데 유토피아는 인간의 의지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수많은 사상가와 작가들이 갈구했다. 이상향을 얘기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유토피아인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유토피아’는 1516년 플랑드르(현 벨기에) 루뱅에서 처음 출간한 토머스 모어의 같은 제목 소설(원제 (De optimo rei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에서 유래한다. 원제를 번역하면 ‘최선의 국가 형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다. 영역 본은 모어가 반역죄로 참수형에 처해진 지 16년 뒤인 1551년 모국인 영국에서 출판됐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없다’는 뜻의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를 합성한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완벽한 사회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사회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녔다. 하지만 이 소설이 출간된 뒤 ‘유토피아’는 모든 것이 완벽한 이상향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굳어졌다.

 

  라틴어로 쓴 이 작품에 모어는 맨 처음 라틴어식으로 ‘아무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의 ‘누스쿠아마’(Nusquama)라는 제목을 붙였다. 네덜란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와 교유가 깊었던 모어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 누스쿠아마를 그리스식 이름인 유토피아로 바꿨다.


 작품은 지은이가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에서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라는 포르투갈 선원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는 형식을 띤다. 가상의 인물인 히슬로다에우스는 유명한 항해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따라 신세계를 여행하다가 유토피아 섬에서 5년 간 생활한 것으로 그려진다. 

                                                                                                

                                                                              <토머스 모어 초상화>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양대 철학은 평등과 쾌락이다. 평등과 쾌락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긴밀한 관계다. 유토피아의 가장 큰 특징은 공동소유 사회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지만 사유재산을 축적하지 않는다. 집과 옷을 비롯한 물품은 필요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된다.

 

  남녀가 어렸을 때부터 평등하게 의무교육을 받는다.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믿을 수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도 공동소유제가 나오지만 귀족들만의 공산주의다. 이와 달리 유토피아는 모든 주민의 공산주의 체제다. 돈을 쓰지 않으며 금욕적인 무소유를 특징으로 하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사회주의 이론이나 현실 공산주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유토피아는 54개 자치도시로 구성되고, 주민이 뽑은 대표가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체제라는 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 공산주의와 다르다. 지배자도 없고 피지배자도 없다. 공직자는 대부분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1년이다. 


 경제기반은 공동소유제의 농업이다. 하나의 농장에는 40명 미만이 산다. 2년마다 도시인과 농민이 교체되며, 집도 10년마다 추첨으로 교환한다. 마을 회관에서는 모두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집도 나라에서 준다. 한마디로 ‘보편적 복지’가 실현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 노동이 노예의 몫으로 돼 있는 플라톤의 ‘국가’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기 때문에 하루 6시간만 일한다.


 양대 철학의 다른 축인 쾌락은 개인적인 쾌락이 아니라 선과 도덕, 사회적 책임을 수반한 쾌락이다. 사람들은 정원 가꾸기를 즐긴다. 그들은 식사를 포함해 여러 가지 일을 공동으로 하며 사치와 허식을 배격한다.

                                                                                                

                                                                         <토머스 모어 가족>


 “양들은 언제나 온순하고 아주 적게 먹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양들이 너무나도 욕심 많고 난폭해져서 사람들까지 잡아먹는다고 들었습니다. 양들은 논과 집, 마을까지 황폐화시켜 버립니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충격적인 표현 때문에 유명해진 이 구절은 15세기에 이뤄진 ‘인클로저’를 풍자하는 것이다. 인클로저는 15세기 중엽 이후, 주로 영국에서 지주계급이 개방지·공동지·황무지 등을 경계표지로 둘러싸고 사유화한 것을 말한다.


 순결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이 나라 사람들이 나체로 선을 보는 외설적인 모습도 등장한다. “결혼하려고 생각할 때, 신부가 될 여자는 처녀든 과부든 간에 존경할 만한 기혼 부인의 입회 아래 신랑이 될 남자에게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보이며, 신랑의 보호자는 신랑이 될 남자의 벗은 몸을 신부에게 보여줍니다.”


 이 책의 중요성은 이상향 추구 못지않게 사회비판의식에 있다. 현실비판은 네 가지다. 첫째, 정부의 과도한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은 억제책으로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 거지·부랑자·도둑이 증가하는 원인에 대한 비판이다. 모어는 그것이 농촌에서 봉건 영주가 몰락하고 시종이나 농민이 추방된 탓이라고 본다. 셋째, 지나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다. 넷째는 정의롭지 못한 원인에 대한 비판이다. 모어는 이를 화폐에 대한 욕망, 사유재산제도에서 찾는다.


 유토피아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반전 평화주의다. 재물과 영토를 늘리기 위한 전쟁을 혐오한다. 모어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한다.

                                                                                              

                                                                                   <토머스 모어 경>
 모어 자신도 위대한 이상주의자였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선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신념아래 목숨까지 바쳤다. 헨리 8세의 이혼과 영국국교 창립을 반대해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힌 모어는 1년에 걸친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534년 그가 단두대에 올라서자 사형 집행관이 도리어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자 모어는 그를 끌어안고 오히려 격려했다. 그 때 남긴 말은 지금도 전 세계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자네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게. 그리고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내 목을 치더라도 수염은 건드리지 말게.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다네.” 죽음의 공포마저 유쾌한 해학으로 극복할 만큼 대담한 모어였다. 

 
 그의 가정생활 역시 ‘유토피아’에 그려진 이상적인 삶에 가까운 것이었다. 모어는 자상한 아버지로서 가족들을 돌보았던 것은 물론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학문과 신앙을 신실하게 키워나갔다.


 ‘유토피아’는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비교되곤 한다. ‘군주론’이 현실주의 정치철학을 낳았다면, ‘유토피아’는 이상주의적 사상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 출간 이후 수많은 유토피언들이 나타났다. 로버트 오언, 샤를 푸리에 같은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같은 과학적 사회주의자들도 넓게 보면 유토피안에 속한다. 모어는 당초 의도와 상관없이 공산주의의 원조 격이 되기도 했다. 독일 사상가 카를 카우츠키는 모어를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부각시켰다.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와 혁명가’ 19명의 이름이 새겨진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기념 오벨리스크에는 마르크스, 엥겔스와 함께 모어가 들어 있다.

                                                                                             

                                                                               <헨리 8세 초상화>


 학자들은 유토피아를 ‘진보의 원리’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노력’으로 이해한다.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유토피아를 ‘사회에 변화의 욕망을 불러일으켜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이념틀’이라고 규정했다. 역사학자인 주경철 서울대 교수는 유토피아를 ‘천년왕국설’과 견주어 설명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리출판사가 ‘유토피아 노동’을 실천해 작은 화젯거리가 됐다. 보리출판사는 2012년 3월부터 ‘6시간 노동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유토피아는 수많은 파생어를 창출했다.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모어의 ‘유토피아’를 넘어 ‘디지토피아’를 열었다는 비유도 나왔다. ‘테크놀로지’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인 ‘테크노피아’도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단어를 ‘실제화된 한시적 유토피아’로 개념화했다. 어린이들이 부모 몰래 숨고 싶어 하는 이층 다락방 같은 공간, 신혼의 달콤한 꿈을 꾸는 여행지, 일상으로부터 탈출한 듯한 카니발의 세계가 그것이다.


 이상사회인 유토피아는 그 반대인 ‘디스토피아’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디스토피아는 실패한 유토피아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같은 작품이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유토피아 실험으로 불리는 소련 공산주의는 70년 만에 막을 내렸다. 북한도 한때 스스로 유토피아 같은 나라라고 선전했다.

 ‘유토피아’처럼 중요한 개념, 그와 관련된 장르의 기원이 이처럼 분명하게 하나의 작품에서 유래한 사례는 흔치 않다. 1975년 설립된 유토피아 학회는 ‘유토피아 연구’라는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을 정도다. 내년이면 출간 500주년을 맞는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유토피아를 둘러싼 거대담론을 끊임없이 이어갈 게 분명하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5년 6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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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영국 법정에서는 지금도 하얀 가발을 착용한 법관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2008년부터 민사·가정재판에서 가발 착용을 금지했으나 형사재판에서만은 예외로 했기 때문이다. 흰 가발은 법정의 존엄을 상징한다. 재판내용이나 판결에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것을 우려해 판·검사나 변호사에 대한 신변보호 수단으로 익명성이 높은 가발을 이용한다는 설도 전해온다.

 

   천장이 높은 영국 법정이 추웠기 때문에 방한용으로 가발이 등장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긴 하다. 하지만 기능성만으로 300년 넘게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영국 판사와 변호사 대다수가 여전히 법정에서 가발 착용을 원하는 반면 국민은 시대착오적인 관습으로 여긴다는 조사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천부인권’ 사상에 바탕을 둔 시대정신에 비춰보면 당초 착용 동기와 상관없이 법정의 가발은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상징물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는 견해도 있다. 누구나 하늘이 내린 인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연법 아래서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것은 하늘 밖에 없는 셈이다. 이에 따라 ‘하늘의 대리자’ 역할을 가발 쓴 판사가 재판한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천부인권의 동의어에 가까운 자연법 사상으로 영국 민주주의의 이론적 틀을 만든 인물이 17세기 정치철학자 존 로크다. 로크는 인간이 원래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천부인권 개념을 정립하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 사상에 이르기까지 근대 민주주의 정치철학의 근간을 세웠다. 로크의 이 같은 정치사상을 압축한 저작이 ‘통치론’(원제 Two Treatises of Government)이다.

 

  이 책은 근대 민주국가의 형성과 통치 원리를 최초로 개념화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 책은 자연법, 사회계약설, 권력분립론 같은 거대담론을 주창한다. ‘통치론’은 당연히 천부인권부터 설파해 나간다. 로크는 들머리에서 ‘모든 인간은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작품이며, 각자가 자기를 위한 재판관이고 집행자인 상태’라고 전제한다. 


 홉스가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가정한 반면,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며 평화롭다고 전제한다. 이 책에서는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견해를 여러 차례 강조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자연법이 지배한다. 자연법은 신에게서 나온 것이어서 모든 사람이 이를 따라야 한다.

                                                                                              

                                                                <영국 법조인들의 하얀 가발>


 로크의 자연법은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다. 이 권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유재산권이다. 자연물은 원래 공공의 것이지만 노동이 개입되면 개인적인 소유가 된다는 게 로크의 생각이다. 이 소유권은 국가가 박탈할 수 없으며, 누구도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재산권은 근대 시민사회 성립에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됐다. 사적 소유를 정당화한 그의 사상은 훗날 개인의 노력에 의한 생산력 증대와 이익 추구로 대표되는 시장 자본주의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연 상태는 자유롭고 평화스럽지만, 이 상태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이 재판관’이기 때문에 언제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나기 쉽다. 이 같은 투쟁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사회 계약’을 통해 평화와 자기 보존을 목적으로 권리를 국가기구에 양도한다.

 

  “인간은 본래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떤 인간도 자신의 동의 없이 이러한 상태를 떠나서 다른 사람의 정치권력에 복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연적 자유를 포기하고 시민사회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도는 재산을 안전하게 향유하고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좀 더 많은 안전을 확보하면서, 상호간에 편안하고 안전하며 평화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정치사회 결성의 목적이 재산 보호에 있다’는 그의 주장은 정치적 자유주의이론의 핵심 요소에 속한다. 
                                                                                                

                                                                           <존 로크 초상화>

 

 이렇게 탄생한 정치체라고 해서 무한한 권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 권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정치권력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형 등 모든 처벌을 할 수 있는 법을 정하는 권리다. 정치권력은 그러한 법을 집행하고 외세 침략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공동체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다. 정치권력은 오로지 공공선을 위해서만 행해져야 한다.”


 ‘통치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권력분립론’이다. 로크는 전제적 국가 권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권력을 상이한 기관에 속하게 하는 권력 분립을 주장한다. 이는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왕권의 해체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입법부가 권력의 중심이다.

 

  행정부는 입법부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집행기관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부라도 법을 만들고 집행까지 할 경우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돼 결과적으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게 로크의 착안이다. 로크의 권력분립론은 훗날 ‘법의 정신’을 쓴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에 영감을 준다.


 로크는 군주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시민의 저항권까지 인정한다. “왕이 권위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경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며 따라서 저항할 수 있다.” ‘통치론’은 입법부가 선언한 법률을 군주나 권력자가 바꾸거나, 입법부의 집회를 방해할 경우 이에 저항할 권리를 명시했다. 저항권은 국민 뜻과 달리 선거방식을 훼손하거나, 입법부 권한을 외세에 넘길 때도 가능하다. ‘왕권신수설’에 따라 왕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 신성모독의 대역죄로 간주되던 시대에 로크는 대담하게 인민의 저항을 권리로 정당화했다. ‘신은 세계를 근면하고 합리적인 자들이 사용하도록 주었다’는 로크의 지론에서는 초보적인 노동가치설이 나왔다.
                                                                    

                                                   <미국 독립선언서 사본>

 

 ‘통치론’은 본디의 제목이 시사하듯 1편인 ‘로버트 필머경과 그 일파의 잘못된 논리에 대한 비판’과 2편인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과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소론’으로 구성돼 있다. 1편은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명제에 따라 절대왕정을 옹호한 로버트 필머와 그 일파의 주장에 관한 전면적 논박이다. 2편은 우리나라에서 ‘통치론’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부분이다. ‘시민정부론’이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 책은 대부분의 혁명적인 저작이 그렇듯이 순조롭게 출판될 수 없었다. ‘혁명을 통해서라도 통치자를 바꾸어야 한다’는 지론으로 무장한 로크는 끝내 더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망명한 뒤에도 새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가 로크를 체포해 줄 것을 네덜란드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는 수많은 가명을 사용하면서 숨어 지내야 하는 수배자 신세가 됐다. 로크는 미리 써놓은 ‘통치론’을 세계 최초의 시민혁명인 명예혁명 다음해 발표해 이 혁명을 사상적으로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1689년 로크는 익명으로 이 책을 출판했다. ‘통치론’은 그때까지도 위험한 저작으로 취급받아 이름을 감추고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명저 ‘서양 철학사’에서 로크를 ‘행복한 철학자’로 묘사한다. 철학자로선 드물게 로크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사상이 동시대인들에게 환영받고 실현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혁명의 성공으로 정치현실을 변화시켜 영국 근대 정치 철학의 교과서로 불렸다. 더 큰 영향은 미국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의 결정적인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미국 독립혁명에 끼친 로크의 영향력은 ‘독립선언서’가 ‘통치론’을 표절했다는 시비에 휘말렸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선언서 전체의 내용이나 구성은 물론 구체적인 문장까지 ‘통치론’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대영국의 현재 국왕의 역사는 악행과 착취를 되풀이한 역사이며, 그 목적은 직접 이 땅에 절대 전제 정치를 세우려는 데 있었다.”

 기초자인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동안 어떤 책이나 팸플릿도 옆에 두고 참조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통치론’과 유사하다는 혐의를 벗지는 못했다. 

 ‘통치론’은 볼테르의 ‘관용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에도 적지 않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로크의 사상은 19~20세기 전체주의와 독재국가들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이끌어내고 정당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이 책은 한계점도 드러난다.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일치’를 주장한 루소와는 달리 권력의 양도를 정치사회 결성의 전제로 삼고 있는 대목이 그렇다. 서구 예외주의도 발견된다. ‘통치론’은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존재하는 재산제도와 정치조직의 차이를 근거로 삼아 유럽 식민주의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통치론’의 사상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출발점으로 기능해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국가의 목적은 인민의 복지이며, 정치권력의 행사는 개인의 동의에 기반을 둘 때 정당하다”는 로크의 견해도 여전히 금과옥조 같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도 천부인권에 바탕을 두고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했다. ‘통치론’은 출간된 지 300년이 넘었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나라의 헌법에서도 살아 숨 쉰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5년 5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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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공부와 운동은 물론 리더십에서도 남자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더 뛰어난 경우도 많다. 당연히 자신감, 자긍심, 열정이 넘쳐난다. 진취적이고 도전의식이 강하다. 성실하고 낙천적이면서 실용적이다. 관심 영역도 넓다. 개인주의 성향이 짙지만 평등주의와 이상주의를 추구한다.


 하버드대 아동심리학과 댄 킨들런 교수가 2007년 제시한 신조어 ‘알파걸’의 특성이다. 미국 10대 엘리트 소녀들을 의미하는 알파걸은 ‘최상’ ‘으뜸’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그리스어의 첫 자모인 알파(α)와 걸(girl)을 결합한 낱말이다. ‘혁명의 딸들’이라는 별칭이 붙은 알파걸들은 여성해방 운동가들의 딸이나 손녀뻘이다. 은수저가 아닌, 페미니스트들의 눈물어린 투쟁의 과실을 물고 태어난 첫 세대다.


 킨들런 교수는 알파걸이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원제 Le Deuxieme Sexe)이라는 책에서 예견한 대로 탄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경제적·사회적 평등의식으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 가능성이 무한대인 여성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킨들런 교수가 말했듯이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의 잠재의식을 일깨우고, 이후 세대에게 길을 터줬다. 알파걸을 포함해 모든 현대 여성들이 이룩했던 수많은 변혁이 그녀에게 빚지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만큼 ‘제2의 성’은 여성의 위상을 높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저작이다.

                                                                       

 

 

   이 책에서 가장 상징적인 문장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가장 유명하고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기도 하다. 이 말은 이미 1800년대에 여성참정권을 외쳤던 여성해방의 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약간 다른 표현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졌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소크라테스의 말로 더 유명해진 것과 흡사하다. 보부아르는 서양문화권에서 ‘여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넓고도 깊게 천착했다.


 1천여 쪽에 이르는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모든 분야에서 비대칭적이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되어 있고, 자유롭지 못하다. 여자와 남자가 신체적 조건에 차이가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신체적 차이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여자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자 아이와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기 시작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여자 아이는 사회·문화적 환경 때문에 남자의 종속물이나 다름없이 길들여진다.


 여자는 성장해 가면서 사회의 강요와 구속을 한층 더 노골적으로 받는다. 그럴수록 여성은 스스로 ‘여자다움’이란 굴레를 쓰게 된다. 여성적인 것은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은 정상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성은 스스로를 정의내리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시각과 가치를 통해 규정된다. 남성이 지배하는 문화는 여성을 경제적·정치적·육체적·정신적·법적·역사적으로 억압받는 존재로 만들었다.

                                                          

 여성이 독창적인 삶을 개척해야 한다고 일깨워주는 남성은 물론 여성도 없다. 여성은 관습에 얽매이게 된다. 자연히 여성은 불가피하게 남성의 보호나 사랑을 받으며 안주한다. 사랑의 의미도 남녀에 따라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가 난다. 사랑이 남자에게는 일시적인 관계이며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여자에겐 인생 자체다. 사랑의 결실인 결혼도 여성에게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구속력을 지니지만, 남성에겐 남성 우위 사회를 떠받치는 버팀목으로 작용한다. 결혼이 여성의 자유를 구속하는 현실에서는 부정돼야 한다. 남자들은 그동안 남녀 역할 분담으로 인한 차별장치를 만들어 두고 이를 ‘불평등속의 평등’으로 미화해 왔다. 남녀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성 차이 속의 평등’을 모색해야 할 때가 됐다.

                                                                       

                                                    <시몬 드 보부아르>

 

 보부아르 자신도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이 계약결혼은 1931년 2년간 시한부동거로 시작됐으나 1980년 사르트르가 죽을 때까지 50년간의 평생계약으로 끝났다. 보부아르는 여성 문제의 근원을 경제력에서 찾았다. 그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한 경제적 자립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가 사회주의운동이라는 도구로 여성 해방을 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출산이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모성애까지도 부정하는 과격성을 드러냈다.


 이 책은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여자? 아주 단순한 거지. 여자는 자궁이며 난소야. 요컨대 암컷이지…남자들이 암컷이라고 내뱉을 때 그 말은 경멸하는 것처럼 들린다. 남자들은 자신을 수컷이라고 하면 더욱 득의만만해지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여자를 자연 속에 놓아주지 않고 그녀의 섹스 속에 감금시키기 때문이다.”


 보부아르가 다른 여성운동가들과 비교해 높이 평가 받는 까닭은 단순히 남성들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으로 생물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신학, 철학 등 폭넓은 이론을 바탕으로 여성 권리 주장의 당위성을 천명했다.


 보부아르는 ‘미국의 흑인문제가 따지고 보면 백인문제이듯 여성문제도 실상은 남성문제’라는 시각으로 접근했다. 물론 남녀 차별 문제의 화살을 남성 쪽으로만 돌리지는 않았다. 여성 스스로 차별을 부르는 각종 신화를 만드는데 일조했음을 시인한다. “여자들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남자들이 베푸는 것만 받아왔을 뿐이다. 여성들은 단 한 번도 독립된 계급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냥 운명에 체념해왔을 뿐이다.”

                                                                   

                                                   <장 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렇지만 이 책의 결론격인 마지막 문장은 지나치게 도전적이지 않다. “이 주어진 현실 세계에 자유의 승리를 가져오느냐 마느냐는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다. 이 지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해서 분명히 우애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보부아르는 맨 처음 이 책의 제목으로 ‘타자, 제2의 존재’를 상정했다고 한다. 남자가 ‘본질적인 존재’인 것과 달리 여성은 ‘본질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의미였다. ‘쓸모없는 자’ ‘다른 곳에 있는 자’를 의미하는 ‘타자’라는 용어는 이 책에서 내내 되풀이되는 말이다. 두 번째로 생각한 제목은 ‘또 하나의 성’이었다. ‘제2의 성’이라는 마지막 안을 떠올리고선 ‘이것이다’라며 무릎을 칠 정도였다고 한다.


 1949년 이 책이 출간되자 프랑스 사회는 벌집 쑤셔놓은 듯했다. 남자 지성인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알베르 카뮈는 즉각 “프랑스 남성을 조롱했다”고 개인성명까지 발표해 격렬하게 비난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포르노”라고 쏘아붙였다. 바티칸 교황청은 이 책을 곧바로 금서목록에 올렸다. “성경의 이념도 남성의 여성 장악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는 대목이 교계를 결정적으로 자극한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진영마저 보부아르를 싸늘하게 대했다. 여성해방은 계급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좌파의 주장이었다. 사실 이 책이 나온 1949년은 프랑스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지 5년 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이와는 달리 당대 여성들은 열렬한 호응으로 화답했다. 출간 1주일 만에 2만부가 팔려나갈 만큼 당시로서는 초베스트셀러였다. 1953년에 나온 영역 본은 2백만 부 이상 팔렸다. 미국 독자들로부터 엄청난 호평을 받은 뒤 프랑스에서 재조명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 저서이자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교과서로 불린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1998년 ‘인간의 삶과 정신을 바꿔놓은 20세기 10대 논픽션’의 하나로 ‘제2의 성’을 꼽았다.


 1986년 보부아르가 세상을 떠나자 각계의 추도사에서는 ‘페미니즘의 성서’, ‘페미니즘의 어머니’ ‘여성운동의 최고사제’ 같은 숭앙의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2006년 프랑스 파리의 센 강에 서른일곱 번째 다리가 개통됐을 때 ‘시몬 드 보부아르교’란 이름이 붙여졌던 것도 ‘제2의 성’을 기리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파리의 다리에 여성 이름이 붙여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2의 성’은 20세기 전반 여성 참정권의 획득 이후 다소 쇠퇴의 길을 걷던 서구 여성운동 제1의 물결을 20세기 후반 여성해방운동 제2의 물결로 승화시킨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집력이 부족했던 여성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문화적 성(Gender)을 구분하는 현대 여성주의의 운동은 보부아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여성의 신비’라는 저작으로 미국 여성운동의 기치를 높이든 베티 프리단을 비롯한 전 세계의 여성운동가들은 보부아르의 이 책을 읽고 무한한 용기를 얻었다고 입을 모아 회고한다.


 한국에서는 이 책이 초판 이후 거의 4반세기만인 1973년 처음 번역돼 나와 가부장적 전통을 무너뜨리는 일등 공신이 됐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쓰인 책 가운데 최초로 한국사회에 소개된 것이다. 한국의 여권운동가들과 여성학자들은 한결같이 이 책을 성전으로 여겼다.


 이 책은 지금으로선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지 모른다. 여성학자들은 이 책이 위계적 이분법 비판보다 여성이 열등하게 평가된다는 점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뒀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기도 한다. 보부아르가 여성의 수동성과 여성의 과제, 성적 무지, 결혼에서의 역할 등 대부분을 19세기의 상황에 맞춰 서술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조차 성적인 계몽에 관한 한 1950년대 초까지 사실상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도 보부아르의 주장은 여전히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여자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서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삶을 누리고 있다고 단정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5년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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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칭 ‘국보 1호’였던 국문학자 겸 영문학자인 양주동 선생의 수필집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에는 기하학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실려 있다. 양 선생은 중학교 속성과정에 입학한 직후 새로 산 교과서를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기하’(幾何)라는 과목이 무슨 뜻인지 알수 없었다. 한문의 뜻만 보면 몇(幾) 어찌(何)였다. 궁금증을 떨쳐버리지 못한 그는 첫 시간에 선생님에게 심각하게 질문했다. “선생님, 기하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몇 어찌’(幾何)라니요?”


 모든 학생들이 “와~”하고 웃었지만, 선생님은 진지한 질문임을 확인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영어의 ‘geometry’를 중국 명나라 말기의 서광계(徐光啓)라는 유명한 학자가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지오’를 따서 ‘지허’(幾何)라고 음역(音譯)했다. 이를 우리 한자음을 따 ‘기하’라고 표기하게 됐다.” 원래 뜻인 ‘토지(geo) 측량(metry)’과 거리가 먼 번역어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기하학은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됐다. 해마다 나일 강이 범람해 내 땅이 어디까지인지 알아내기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기하학이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정문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현판이 내걸렸을 만큼 기하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였다. 기하학을 강조했던 플라톤은 “신은 기하학적으로 사고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 ‘기하학’이라면 유클리드를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유클리드는 기하학의 대명사다. 그런 유클리드가 플라톤학파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게 다가온다.

                                                                                                


 유클리드가 집대성해 펴낸 ‘기하학원론’(원제 Stoicheia, 영어로는 Elements)은 2000년 넘게 기하학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13세기 영국 철학자 로저 베이컨의 말이 이를 잘 대변한다.“신은 이 세계를 유클리드 기하의 원리에 따라 창조했으므로 인간은 그 방식대로 세계를 그려야 한다.”


 ‘기하학원론’은 ‘세계의 기원이 된 책’으로 불린다. 기원전 3세기에 이 책을 쓴 고대 그리스 수학자 에우클레이데스는 우리에게 유클리드라는 영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유클리드가 위대한 것은 수많은 기하학적 명제들을 발견해서만이 아니다. 그것들을 단 다섯 개의 공리에서 연역적으로 이끌어내 ‘기하학원론’에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자료를 한데 모아 정리와 증명으로 이루어진 논리적이고 연역적인 구조를 짜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명제들은 평평한 추상적 공간을 전제로 한다면 지금도 대부분 참이다.


 이 책의 핵심인 유명한 공리(公理)는 다섯 가지다. (1) 동일한 것과 같은 것은 서로 같다.(A=B이고 B=C이면, A=C이다.) (2) 동일한 것에 같은 것을 더하면 그 전체는 서로 같다.(A=B이면, A+C=B+C이다.) (3) 동일한 것에서 같은 것을 빼면 그 나머지는 서로 같다.(A=B이면, A-C=B-C이다.) (4) 겹쳐놓을 수 있는 것은 서로 같다.(합동인 것들은 서로 같다.) (5)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공리는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증명할 수 없지만 직관적으로 자명한 진리의 명제인 동시에 다른 명제들의 전제가 되는 명제다.

                                                                                           

                                                                    <유클리드의 상, 옥스포드 대학 박물관>


 공준(公準)도 다섯 가지다. (1) 임의의 점으로부터 다른 임의의 점에 대해 직선을 그을 수 있다. (2) 유한의 직선을 계속 곧은 선으로 연장할 수 있다. (3) 임의의 중심과 반지름을 가진 원을 그릴 수 있다. (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5) 하나의 직선이 두 직선과 만나고 같은 쪽에 두 직각보다 작은 각을 만들 때, 이 두 직선을 한없이 연장하면 두 직각보다 작은 각이 만들어지는 쪽에서 두 직선이 만난다. 공준은 과학적 인식의 시초가 되는 명제로서 과학이론의 원리가 된다. ‘기하학원론’은 ‘점은 쪼갤 수 없는 것이다’와 같은 스물세 가지 정의를 바탕으로 삼았다.


 ‘기하학원론’의 수학적 지식은 대부분 유클리드 이전에 알려진 것들이다. 유클리드 자신은 물론 탈레스, 피타고라스, 히포크라테스, 에우독소스 같은 그리스 수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총정리한 것이다. 게다가 다각형의 넓이 구하기와 삼각형의 합동 같은 내용은 요즘 들어선 실용성도 다소 떨어진다. 컴퓨터를 이용하거나 삼각함수·해석기하학과 같은 다른 분야의 원리를 적용하면 훨씬 더 쉽게 기하학을 배울 수 있어서다. 그럼에도 ‘기하학원론’을 ‘인류의 책’이라고 하는 까닭은 담겨있는 기하학 지식보다 내용을 전개해가는 형식과 구조의 독창성 때문이다. 논리적인 사고력을 단련시키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클리드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그리스 영토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수로 활동했다는 흔적만 전해진다. 그 때의 에피소드 두 가지가 기하학 야사를 장식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장(副將)출신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클리드를 초빙했다. 왕은 기하학이 너무 어려워 싫증을 느꼈다. 왕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좀 더 빠르고 편안한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유클리드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아뢰었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나이다.” 이 말에서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는 명언이 파생했다.


 또 다른 일화는 기하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한 제자가 유클리드로부터 정리 한 가지를 배운 뒤 중얼거리듯 말했다. “딱딱한 논리만 있는 기하학이 어디에 쓸모가 있습니까?” 그러자 유클리드는 즉시 노예를 불러 명했다. “저놈에게 동전 한 닢 던져 줘라. 이 불쌍한 인간은 자기가 배운 것으로부터 항상 대가를 얻어야 되는가 보다.”

                                                                                                


 ‘기하학원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수학책으로 꼽힌다. 2000년 넘게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기하학원론’을 읽어야 했다. 유클리드 사후 700여년이 지나 로마의 지식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철학자가 주어진 직선으로 정삼각형을 그리는 법에 대해 물었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기하학원론’의 제 1명제를 들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서로 확인한 참석자들은 모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 같은 문화적 특성을 만들어준 이 책을 그리스어로 논평하는 걸 즐겼다고 한다. 


 세상과 역사를 바꾼 아이작 뉴턴의 걸작 ‘프린키피아’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쓸 때도 ‘기하학원론’과 똑같이 13권의 구성 체제를 따랐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자신의 체계나 방법은 가능한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유클리드의 권위는 그 만큼 대단했다.


 상대성이론을 정립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은 이 책의 영향력을 방증한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은 열두 살 때 유클리드 기하학 교과서를 배운 일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렸을 때 유클리드를 읽고 학구열이 솟구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타고난 과학자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중국에서 근대 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까닭을 그의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밝혔다. “과거 중국에 유클리드 기하학과 실험적인 방법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막는 가장 큰 원인이다.”


 버트런드 러셀도 흡사했다. “나는 열한 살 때 형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웠다. 이는 내 일생일대의 대사건이었다. 나는 마치 첫사랑을 하듯 여기에 빠져들었다.”

                                                                                            

                                                                                 <양주동 박사>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은 말 안장주머니에 항상 유클리드 책을 넣고 다니며 밤늦도록 등불 곁에서 이 책으로 공부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털어놨다. “증명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면 결코 변호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프링필드에서 벗어나 고향의 아버지 집으로 갔다. 나는 유클리드 책 여섯 권의 어떤 명제라도 즉시 암송할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 책의 공리를 바탕으로 한 증명은 미국 독립선언서로 이어졌다고 한다. 독립선언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로 시작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루소는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 교육 사상과 서양 교육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의 바탕을 다졌다. 미국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는 이 책의 공리적 방식에 따라 공정한 선거제도에 필요한 준거들을 일일이 찾아냈다. 청나라 강희 황제는 ‘기하학원론’ 만주어판으로 기하학을 배웠는데, 이 책을 싼 겉표지가 허준의 ‘동의보감’이었다는 재미있는 얘기도 전해온다.


 서양역사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 ‘기하학원론’이라는 주장도 있다. 네덜란드 수학자 루카스 번트는 “1482년 베네치아에서 처음 인쇄본이 나온 ‘기하학원론’은 이후 1000쇄 이상 발간돼 1900년대까지 서구 문명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보급된 책”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기하학에서 경전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 책은 유클리드와 기하학의 동의어로 통용된다. 현재 전 세계 기하학 교과서의 내용은 이 책을 재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초·중·고교에서 배우는 도형 모두가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19세기 중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면서 유클리드 기하학은 절대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진리이고 영향력은 막강하다. ‘평행하지 않은 두 직선은 무한히 늘일 경우 반드시 한 점에서 만난다’는 유클리드의 생각과 달리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곡면 상에서는 여러 개의 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곡면이나 휘어진 공간 등의 도형을 탐구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이 두 개 이상 그어질 수 있다고 가정해도 모순 없는 기하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유클리드가 활동했던 시대부터 전해지는 ‘기하학원론’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대적인 모든 개정 본은 알렉산드리아의 테온이 편집한 개정 본에 근거를 두고 있다. 테온은 유클리드보다 700년 뒤에 살았던 인물이다.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가르칠 때 사용하던 막대는 아직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5년 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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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2084년 구글은 빅 브라더가 된다.” 뉴욕 타임스는 2005년 구글 어스의 무서운 카메라를 이렇게 풍자했다. 뉴욕 타임스는 당시 2084년 구글의 가상 홈페이지를 그려놓고 사용자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구글이 보여줄 것이라며 냉소했다.

 

  1998년 말에 개봉한 미국 첩보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정보통신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발전이 ‘감시사회’를 탄생시킬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측했다. 강직한 변호사 로버트 클레이턴 딘(윌 스미스 분)의 명대사는 사생활 침해의 심각성을 고발한다. “정부가 우리 집 안방까지 침입할 권리는 없다.” “프라이버시는 사라졌다. 안전한 것은 오직 머릿속에 있는 것뿐이다.”


 두 사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착안한 또 다른 경종이다. ‘1984’는 전체주의 비판과 함께 미래의 예지력이 담긴 명작으로 상찬 받는다.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전체주의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감정과 사고까지 철저히 파괴해 상상력마저 앗아가는 전율스러운 미래에 대한 경광등(警光燈)이다.

                                                                     

 

 ‘1984’는 당초 제목이 ‘유럽의 마지막 사람’이었다. 이를 너무 밋밋하게 여긴 출판사가 책 완성단계의 해인 1948년의 마지막 숫자 48을 84로 바꿔 제목으로 달았다고 한다.


  이 소설의 무대인 가상의 초강대국 오세아니아는 영사(영국사회당)의 우두머리인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국가다. 1984년, 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거대한 3개 국가로 재편된다. 세 초강대국은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전쟁을 벌임으로써 평화를 유지한다. 오세아니아에는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협박하는 대형 포스터가 모든 거리와 건물에서 유령처럼 나부낀다. 사람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송수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이 걸려 있어 개인의 내밀한 삶까지도 샅샅이 감시한다.


 심지어 인적이 드문 숲속이나 들판에도 마이크로폰이 숨겨져 있다. 시내에는 수시로 헬리콥터가 떠다니며 건물 안을 들여다본다. 거리마다 사상경찰이 돌아다닌다. 반체제 인사는 고문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한다. 성욕까지도 국가가 통제한다. 결혼의 단 한 가지 목적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기 위해서다.                                                                                      

                                                                           <빅 브라더 상징물>


  빅 브라더의 목표에 걸맞지 않으면 문서, 신문, 서적, 녹음, 영화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모든 기록을 수시로 삭제하고 조작한다. 당의 슬로건이 이론적으로 잘 뒷받침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모든 정부기관은 진리부, 평화부, 애정부(愛情部), 풍부부(豊富部) 네 개 부로 이뤄졌다. 부서 이름은 하는 일과 정반대다. 진리부는 보도·연예·교육·예술을 담당하지만 과거를 조작하는 일을 전담한다. 평화부는 전쟁을 맡는다. 애정부는 법과 질서를 엄격히 유지하는 일을 한다. 풍부부는 경제 문제를 책임진다. 지배자는 허황된 수치로 경제성과를 자랑하면서도 인민을 굶주리게 한다. 


  당은 기존 언어 대신 ‘신어’를 만든다. ‘신어’ 창조는 ‘좋은’의 반대가 ‘나쁜’이 아니라 ‘안 좋은’으로 바꾸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시작됐다. 이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휘를 줄임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화시켜 이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생계형 작가 조지 오웰>

 

   정부청사에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우아한 필체로 쓰여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역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진리부에서 일하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자유는 2 더하기 2는 4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2 더하기 2는 5라고 소리친다.  


  ‘1984’는 전체주의라는 용어의 이미지를 정립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이 책에는 전체주의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스토리에서 연상되는 그림은 자연스레 전체주의 이미지로 각인됐다. 이때부터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냉전체제 아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의 힘을 결집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정치용어로 자리 잡는다. 문학평론가들도 ‘1984’가 스탈린 치하에서 전체주의 국가로 변질하던 소련의 모습을 비판한 작품이라고 여겼다.


  냉전체제가 붕괴된 후에도 사실상 마지막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이 ‘1984’의 디스토피아에 딱 들어맞는 나라로 지목된다. 북한을 다녀온 외국 언론인들은 한결같이 그곳이 ‘1984’의 복사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고 썼다. 최고의 북한 여행안내서가 바로 ‘1984’라고 표현한 기자도 있을 정도다.


  이 책을 스탈린주의가 중심이 되는 정치적 전체주의를 다룬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1984’에 담긴 오웰의 경고는 특정한 시대, 특정한 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권력이나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감시하고, 특정 이익을 위해 사실과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한 그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초강대국 오세아니아에 속해 있는 ‘에어스트립 원’은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을 가리킨다. 윈스턴이 살고 있는 도시는 런던이다. 높이가 300미터나 되는 초고층 건물들과 인간을 끊임없이 감시하는 ‘텔레스크린’ 등으로 미뤄 보아 오세아니아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나라다. 오세아니아 사회는 폭력과 억압만이 정치 이데올로기를 이루는 ‘정치적 전체주의’ 국가인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고도의 ‘기술적 전체주의’ 국가이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정치적 전체주의’와 ‘기술적 전체주의’가 교묘하게 혼합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실제로 그가 그린 ‘감시사회’는 최첨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실감나게 재현된다.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의 도·감청 실태를 폭로해 세계적 파장을 일으킨 전 중앙정보국(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은 정부의 사생활 감시가 오웰의 소설 ‘1984’보다 심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가 첨단 전산 시스템인 프리즘이란 프로그램으로 세계적인 통신사와 IT기업 서버에 접속한 다음 개인 정보를 비롯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온 사실이 폭로된 이후 전문가들은 견제되지 않는 빅 데이터는 또 다른 ‘빅 브라더’를 낳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소설의 무대인 영국에서조차 세계에서 감시가 가장 일상화된 나라가 됐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영국 사생활 보호단체인 ‘빅브라더워치’는 영국에 최대 600만대의 CCTV가 설치·운용 중인 것으로 추산한다. 선진국 정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까지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빅 브라더’ 논란이 전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지 오래다.


 이명박 정부에서 민간인 불법사찰 논란이 불거지자 당시 남경필 의원은 ‘1984’의 빅 브라더가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사이버 사찰과 카드사의 대량 개인정보유출 사건이 터질 때마다 ‘1984’가 우려의 메시지로 호출되기도 한다.


 이동통신회사들이 스마트폰에 내장된 소프트웨어를 통해 사용자의 문자메시지, 이메일, 통화기록, 방문한 웹사이트, 열람한 동영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음이 드러나자 ‘빅 브라더’가 따로 없다는 염려의 목소리가 지구촌 곳곳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독일에서는 ‘포에버드’라는 시민단체가 매년 빅브라더 상을 준다. 이 상은 개인정보를 가장 많이 침해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돌아간다. 눈길을 끄는 건 2004년 내무부장관이 받았다는 사실이다.


 현대판 ‘빅 브라더’ 논란은 이 책의 판매급증을 몰고 오기도 한다. 스노든 사건 직후 미국에서 한때 5800퍼센트의 매출증가율을 보였다. ‘1984’는 2008년 하버드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구입한 도서 1위, 2009년 ‘뉴스위크’ 선정 역대 세계 최고의 명저 2위에 뽑히기도 했다. ‘1984’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은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과 더불어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힌다.


 이 책은 수많은 신조어를 낳았다. 조직화되어 인간성을 잃은 ‘오웰리언’, 선전활동을 위한 사실의 조작과 왜곡을 의미하는 ‘오웰주의’, 감시가 심한 사회를 일컫는 ‘오웰리언 사회’, ‘오웰식 논리’, ‘오웰식 사상’, ‘오웰식 각성’, ‘오웰식 사고방법’ 같은 용어가 새로 탄생했다. ‘빅 브라더’는 정보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됐다. ‘빅 브라더’는 미국에서 출간된 책 ‘가장 영향력 있는 허구 인물 101명’ 가운데 인류의 삶을 바꾼 가상인물 2위에 꼽혔다.

                                                                                         


 ‘오웰식 언어’라고도 불리는 이중화법 표현은 ‘불경기’나 ‘경기 후퇴’라는 말 대신 ‘경기 순환’ 또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둘러대는 식이다. ‘실업’은 ‘미고용’, ‘증세’는 ‘세입 증대책’, ‘가격 인상’은 ‘가격 현실화’라는 단어로 치환된다. ‘1984’는 정치 지도자들이 시민들에게 주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말을 에두르거나 모순된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고 빗댔다.


 이 작품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도 주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는 ‘1984’에서 문제의식을 빌렸다. 마이클 래드퍼드 감독의 동명영화 ‘1984’와 리들리 스콧이 만든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 CF도 같은 해에 나왔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역시 오웰의 세계를 패러디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9년 가장 직접적이고도 창조적인 ‘1984’ 오마주인 ‘1Q84’를 바쳤다.


 미국 미래학자 데이비드 굿먼이 1972년 ‘1984’에서 예언한 137가지를 검토해 보았을 때 80가지가 실현됐으며, 1978년에 다시 비교했더니 실현된 게 무려 100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지금 조사해보면 95퍼센트 이상이 맞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문학의 놀라운 예언력을 방증하는 통계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5년 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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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의 한 연구팀이 열다섯 살 난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실험을 했다. 동물의 지능적 한계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연구팀은 온갖 노력을 기울여 140여개의 낱말을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 곧이어 낱말을 자기 생각에 따라 결합할 수 있도록 수준을 높였다.

 

   그러자 이 침팬지가 맨 처음 표현한 말은 “나를 놓아 달라”는 것이었다. 동물도 무엇보다 자유를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게 이 실험결과다. 인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미국 독립 혁명 지도자 패트릭 헨리의 명언은 침팬지 실험과 상통한다.

 

 ‘자유’를 사실상 처음 철학적 원리로 체계화해 세계 지성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는 영국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자유주의의 가장 위대한 교사’로 불린다. 그가 1859년 세상에 내놓은 ‘자유론’(원제 On Liberty)은 전 세계 민주주의의 전범이 되고 있다.

                                                                    

 

 

   영국인들은 자유를 얘기하면서 흔히 ‘3존’(John)을 꼽는다.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 ‘아레오파지티카’의 저자 존 밀턴, ‘시민정부론’을 주창한 존 로크가 그들이다. 특히 밀은 19세기 영국에서 카를 마르크스보다 중요한 사상가이자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릴 만큼 천재적인 지식인이었다. 당시 영국 사람들은 밀을 ‘이성(理性)의 성자(聖者)’라고 일컬었다.

 

 밀이 ‘자유론’에서 각별하게 강조하는 자유는 ‘사상의 자유’다. 모든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게 밀의 확신이다. 밀은 자유의 영역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의식의 내면적 자유, 취향과 탐구의 자유, 단결의 자유가 그것이다.

 

  내면적 자유에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모든 문제에 관한 의견과 감각의 절대적 자유가 포함된다. 단결의 자유에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들어있다. 이러한 자유가 없는 사회는 통치형태가 어떤 것이든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고 밀은 웅변한다. 밀은 자유의 원칙은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를 요구할 수 없다고 한다.

                                                                        

                                                      <존 스튜어트 밀>

 

 이 책은 또 자유를 사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로 나누고, 행동의 자유를 다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자유로 세분한다. 밀은 어느 경우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라고 역설한다. “개인의 행동 중 사회의 제재를 받아야할 유일한 것은, 그것이 타인과 관련되는 경우뿐이다. 반대로 자신만 관련된 경우 그의 인격의 독립은 당연한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자신에 대해, 즉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 각자는 주권자다.”

 

 밀이 가장 중요시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진리를 찾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는 여기서 가장 유명한 말 하나를 남긴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은 현 세대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인류에게까지 강도질하는 것과 같다고 경종을 울린다.

 

 밀은 토론 없는 진리는 독단이며,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대론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견에 대한 판단 오류는 무오류의 독단에서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사람들이 마음 놓고 믿는 것일수록 온 세상 앞에서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밀은 어떤 사상도 절대적일 수 없다며 자신의 저술이나 사상에 대한 신성시조차 거부한다.

                                                                

 

 그는 토론을 거치지 않고 의견을 탄압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 옳지 않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첫째, 권력이 탄압하려는 의견이 진리인 경우, 이를 탄압하는 것은 인류에게 해를 끼칠 무오류라는 전제에 선 것이므로 잘못이다. 둘째, 탄압받는 의견이 진리가 아닌 오류일 경우도, 탄압은 널리 인정된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왜 그것이 진리인지를 인식하는 수단을 앗아간다. 셋째, 일반적 사회통념과 이에 반하는 의견이 모두 진리일 경우에 대한 탄압은 그것에 의해 한 세대가 다른 세대의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경합하는 의견들의 과정에 대한 간섭이다.

 

 그는 다수의 횡포가 정치적 탄압보다 훨씬 무섭다고 말한다. 밀은 소수 의견을 발표할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 4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셋째, 여론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토론을 통한 검증이 없다면 합리적인 근거를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치우쳐 버릴 수도 있다. 넷째, 통설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토론이 없다면, 그 주장의 의미 자체가 실종되거나 퇴색하고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론’의 핵심원리 가운데 하나는 다양성이다. “개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도, 그것이 신의 의지나 인민의 명령을 강행하는 것이라고 공언된다고 해도, 모두 전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밀은 국민 교육의 전부나 대부분을 국가가 장악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교육의 다양성도 천명했다.

 

   “전체적 국가 교육은 오직 국민을 틀에 집어넣어 서로 너무나 흡사하게 만들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국가가 국민을 정형화하는 틀은, 결국 국가권력을 장악한 우월한 세력-군주건, 승려계급이건, 귀족계급이건, 현재 대중의 다수파이건-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교육이 효과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국민의 정신에 대한 압제가 확립되며, 그 압제는 자연의 추세로서 국민의 육체에 대한 압제를 유발한다.”

                                                                 

                                               <밀과 헬렌 테일러. 헬렌 테일러는

                                                                   헤리엇 테일러의 딸이다.>

 밀이 ‘자유론’에서 당시 중국을 분석한 걸 보면 매우 흥미롭다. “중국은 한때 놀라운 재능과 지혜를 과시했다…지혜가 가장 뛰어난 현자와 철학자들이 명예와 권력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정치제도를 만들어냈다…이런 민족이라면 계속해서 세계 역사를 이끌어 가야 했다…그러나 사실은 반대로, 그들은 정체되었고, 그 정체는 몇 천 년간 지속되었다.” 그는 중국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유로 단 한 가지를 들었다.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만들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동일한 규칙에 따라 통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시민생활에 대한 국가권력의 간섭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소신도 펼친다. “가장 선량한 국가라고 해도, 가장 불량한 국가와 마찬가지로 어떤 강제 권력도 행사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재미 있는 것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알랭 드 보통이 남녀관계의 해결사로 ‘자유론’을 내세운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국민에게 다른 구두를 신으라거나, 어떤 책을 읽으라거나, 이를 치실로 닦으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듯이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알랭 드 보통은 익살을 섞어 얘기한다.

 

 ‘자유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옳다고 하긴 어렵다.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 미숙자나 미개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아도 좋다고 한 대목에는 제국주의 의식에 따른 편견이 담겼다. 밀이 식민지에서는 자유가 아니라 전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한 것은 식민지의 전제적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었다.

                                                                      

                                                        <존 로크> 

 

 밀의 자유주의는 자유무역과 시장개방, 기업 규제 완화와 정부의 경제 개입, 복지제도의 감축 등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와는 다르다. ‘자유론’은 후세의 일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특유의 건강성을 해쳐 오히려 체제를 약화시키는 이론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책의 문제점은 몇 가지 의문부호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행동을 순수하게 개인만 관련된 행동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그처럼 확연하게 구분되는 행동이 있는가? 있다면, 그런 구분은 누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자유론’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서려 있다. ‘자유론’을 쓰던 중 밀의 부인 해리엇 테일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밀은 20여 년의 기다림 끝에 남편과 사별한 테일러와 결혼했다. 밀이 쓴 대부분의 글은 정신적 동반자이자 조력자인 테일러의 감수를 거쳐 세상에 발표됐다. 밀은 테일러를 그리워하며 ‘자유론’의 원고를 미완성 상태로 출판사에 넘겼다.

 

 ‘자유론’은 같은 해에 서구인의 의식 궤도를 바꾼 다른 책 한 권과 더불어 출간돼 시너지효과를 불러왔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그것이다. ‘종의 기원’이 기독교 중심의 서구세계를 과학 중심의 세계로 전환시켰다면, ‘자유론’은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길을 밝힌 횃불과 같았다.

                                                                   

                                                            <존 밀턴>

 

 ‘자유론’은 세계 지성사는 물론 정치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현대 자유주의의 초석을 놓았다. 인류는 밀이 인도한 방향을 따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도 헌법에 신체, 직업 선택, 양심, 종교, 언론·출판·집회·결사, 학문과 예술의 자유 등을 규정해 ‘자유론’의 정신을 구현했다. 언론 자유에 관한 ‘자유론’의 사상은 거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수용됐다. 우리 헌법에서도 이를 반영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 다만 언론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해서는 안 되며,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때에는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게 했다.

 

 이 책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마다 단골로 인용되는 고전이기도 하다. 우리가 왜 비효율과 무질서를 감내하고서라도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지를 충분하게 논증해 준다. 그런 점에서 ‘자유론’은 자유민주주의, 자유세계, 자유국가의 성서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자유론’은 공리주의를 한 단계 성장시켜 공동체주의의 밑그림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의론’을 쓴 존 롤스와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같은 스타급 학자들도 밀의 상속자에 속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5년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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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방황하는 나그네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진정 거처할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 즐거움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에피쿠로스학파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에는 이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정문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현판이 내걸렸던 것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적 유물론과 쾌락주의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쾌락주의는 방탕이나 환락을 즐기는 게 목표가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과 절제를 좇는다. 부귀영화가 아닌 박애,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아닌 소박한 음식, 색욕보다 우정을 추구한다. 세상의 쾌락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쾌락주의 철학의 역설 같다.

 

   플라톤학파(아카데미학파), 아리스토텔레스학파(소요학파), 스토아학파와 더불어 헬레니즘 시대의 4대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인 에피쿠로스학파는 여성과 노예들도 받아들여 진정한 평등사상을 실천했다. 기원전 4~3세기에 걸쳐 살았던 에피쿠로스는 무신론은 아니더라도 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군에 속하기도 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2세기 뒤쯤 태어난 철학자이자 시인 루크레티우스(기원전 99년경~55년경)가 없었다면 오늘날처럼 널리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예수에게 베드로가 없었다면’이란 가정과 흡사하다. 에피쿠로스가 300여 권의 책을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세 통의 편지와 40개의 금언뿐이라고 한다. 루크레티우스가 기원전 50년쯤에 쓴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원제 De rerum natura)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철학시집이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우주론, 윤리학, 물리학을 전해주는 대표 문헌인 셈이다.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루크레티우스를 단테·괴테와 더불어 ‘3대 철학 시인’으로 꼽았다. 루크레티우스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게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귀족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아니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유럽 역사에서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될 무렵 지식인들에게 가장 주목받고 널리 읽혀진 철학시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였다. 이 책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는 ‘원자론’이다. 모든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졌다는 게 원자론이다.

                                                                    

                                                   <루크레티우스 상상도>

 

   루크레티우스는 우주에는 창조자나 설계자가 없다고 했다. 오직 우연이 지배하는 끝없는 창조와 파괴만이 있을 뿐이라는 게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이다. “태고부터 우주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입자들이 충격에 의해서 뒤흔들리고 떠밀려서 다양한 모습으로 온갖 종류의 움직임과 결합을 실험해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창조하고 구성한 것과 같은 배열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원자들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주장한다. 에피쿠로스가 사실상 완성한 ‘원자론’은 만물의 생성소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이다. 예수와 기독교가 탄생하기 전에 나온 책이지만, 매우 불온한 사상을 지닌 책으로 취급받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주가 있다고 믿은 반면, 루크레티우스는 신들이 존재하나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조물주가 없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이 책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 철학용어 ‘원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최초의 것들’ ‘물질의 본체’ ‘사물의 씨앗들’ 같은 말로 표현한다. 루크레티우스에게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무한하다. 이 세상에는 물질과 진공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죽으면 영혼도 사라진다. 다시 태어나거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일은 없다.

                                                                   

                                                     <에피쿠로스>

 

  인간은 한때 우주에 머무는 것이니,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역설한다. 인생 최고의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당장 고통을 수반하는 쾌락이나 언젠가는 고통을 가져올 쾌락은 피해야 한다. 사회적 지위나 권력, 재산도 별 의미가 없다.

 

  인간은 결코 이 세상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게 루크레티우스의 지론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구성하는 것들과 똑같은 물질로 돼 있다. 인간은 물질계에서 벌어지는 훨씬 더 큰 물질순환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서 영원하리라고 믿어선 안 된다.

 

  중세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으며, 불경하다고 생각했다. 우주가 무한한 진공 속에 존재하는 원자들의 충돌로 형성됐다는 내용은 터무니없게 들렸다. 총 7400행에 달하는 이 시는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지적 야망으로 가득하다. 시의 언어는 까다롭고, 구문은 복잡하다.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이 책은 내용 못지않게 기묘한 운명이 더없이 흥미롭다. 기원전 50년쯤 쓰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부터 매료했다. 동시대의 인물 키케로와 오비디우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키케로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원리를 강하게 비판했으나, 이 책의 놀랄만한 힘은 인정했다.

 

  하지만 서로마제국 멸망 후 차츰 잊힌 것은 물론 책 자체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9세기 이후 프랑스와 독일 수도원 두세 곳에서 떠돌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적대적인 이교에 의해, 그 다음에는 역시 적대적인 기독교에 의해 헛된 몽상, 위험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상이라고 낙인 찍혀 이동이 억제됐다.

 

  500년 뒤쯤인 1417년 ‘책 사냥꾼’이란 별명을 지닌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의 한 수도원 서가에서 이 책의 옛 필사본을 발견하면서 드라마 같은 미래가 시작된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매장해 버린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가톨릭 수도원에 이 책의 사본 한 권이 흘러든 것부터 우연이었다. 썩어 없어질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그 사본을 9세기의 어느 날 한 수도사가 베끼기 시작한 것도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그 필사본이 500년이라는 시간의 마수(魔手)나 화재를 견디고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포조의 손에 떨어지게 된 것 역시 엄청난 우연이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이 책에 “모든 사물은 정해진 운명의 쇠사슬에 매여 있다”고 쓴 그대로 말이다.

                                                                           

 

  포조의 발견은 10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한 편의 고대 철학시가 다시 읽혀 세계사의 진행을 바꾸는 데 기적의 씨앗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의 운명은 원래 이 시에 영감을 준 다른 고대 걸작들과 함께 끝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어야 했다. 이 책의 운명을 추적한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로 퓰리처상을 받은 스티븐 그린블랫 하버드대 영문학 교수는 ‘기원전 4세기의 에피쿠로스와 기원전 1세기의 루크레티우스, 15세기의 포조 브라촐리니의 불가사의한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이 책은 출간된 직후부터 무신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무신론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쟁점이자 불온한 논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계였다.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는 무신론을 단죄하는 종교재판의 심문 교본 역할을 했다. 포조의 재발견으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인 1516년 피렌체 종교회의에 모인 고위성직자들은 학교에서 루크레티우스를 읽는 걸 금지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 이후 이 책의 인쇄본도 빠르게 나왔지만, 서문에는 경고문과 함께 인쇄업자의 종교적 신념과 책의 내용은 무관하다는 내용을 실어야 했다.

                                                                     

                                                        <토머스 제퍼슨>

 

  그럼에도 문예부흥을 알리는 전령사들은 이 불온서적에서 혁명적인 영감을 얻어 르네상스의 새벽을 열었다. 미와 쾌락의 향유에 관한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을 가장 잘 체현하고 인간이 탐구할 목표로까지 밀고 나간 게 르네상스 문화였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베누스(비너스)를 그린 산드로 보티첼리의 걸작은 이 책이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는 사랑과 미의 여신 베누스에 대한 찬가로 시작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기술 연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생한 천문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야심찬 연구, 리처드 후커의 신학 이론에도 이 책이 스며들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정치학, 로버트 버턴의 정신질환에 대한 백과사전식 기술, 월터 롤리의 기아나 탐험기 같은 저작도 쾌락을 극대화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조르다노 브루노, 토머스 홉스, 스피노자의 지적인 대담성도 이 같은 혁명적 사고 속에서 형성됐다.

 

  ‘원자가 자유롭게 이탈한다’는 이 책의 생각은 봉건제의 속박과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계몽주의·자유주의 사상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전해줬다. 몽테뉴는 대표작 ‘수상록’에 무려 100여 행에 달하는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을 정도다. 작가 토머스 모어는 대표작 ‘유토피아’에서 루크레티우스처럼 쾌락을 추구하라고 격려한다. 아이작 뉴턴은 신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이 창조한 원자를 쪼갤 수 없다”고 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창한 카를 마르크스는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였을 정도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심취해 있었다. 이 책의 다섯 종류를 소장하고 ‘에피쿠로스주의자’를 자처한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행복 추구권’까지 보장하도록 명시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책을 독파한 뒤 고대인의 원자론적 세계관을 극찬하며 연구자료로 삼았다.

 

 유종호 예술원 회장은 루크레티우스가 근대 형성에 끼친 과정을 읽고 ‘시도 역사를 만든다’는 글을 남겼다.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는 이처럼 한 권의 책이 지적 혁명을 여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창조해 보여줬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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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소설 ‘은비령’의 작가 이순원의 회상은 황혼이 깃들어서야 날개를 펴기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미국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원제 The Third Wave)에서 예고한 ‘정보화 사회’란 말에서 맨 먼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를 연상했다고 털어놨다. ‘정보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말이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과 겹쳤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 ‘안기부’가 국가최고 권력기관으로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다. 정보라는 말을 놓고 책을 통해서는 ‘토플러의 정보’로 읽고, 현실로는 오웰의 ‘빅 브라더의 정보’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한국엔 전화가 없는 집이 더 많았고, 복사기나 팩시밀리를 구경하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던 시절이었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 토플러가 1970년 ‘미래의 충격’에 이어 1980년에 ‘제3의 물결’을 막 출간했을 때까지만 해도 지적 유희나 꿈을 얘기하는 학자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 강단의 학자들은 대부분 미래학을 과학적 방법론을 장착하지 못한 ‘무늬만 사회과학’일뿐이라고 폄훼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예견했던 일들이 가시화하자 세계는 찬탄해 마지않았다. 미래학을 업신여기던 많은 학자들이 입을 다물었음은 물론이다.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의미 없는 사건의 연속처럼 여겨지는 세계사의 파도에도 일관된 흐름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제1의 물결’인 농업사회, ‘제2의 물결’인 산업사회를 거쳐 ‘제3의 물결’인 정보화 사회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제1의 물결’은 1만 여년 동안 자급자족체제를 인류에게 가져다 줬으나 굶주림과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게 했다. 그 같은 한계로 말미암아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 ‘제2의 물결’에게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만다.

 

  하지만 ‘제2의 물결’도 인류에게 질곡을 안겼다. 산업사회는 표준화·세분화·동시화·집중화·극대화·중앙집권화로 인해 인간을 소외된 존재로 전락시킨 탓이다. 대량생산·대중소비·국가중심 경제체제를 지닌 ‘제2의 물결’의 산업사회는 소량 고부가가치 유연생산·다핵화·범지구적 경체제제를 지닌 ‘제3의 물결’의 정보화 사회로 흘러가는 것이 세계사의 도도한 추세라고 토플러는 예언했다.


 그는 지식집약적 생산기술의 등장과 정보처리 전달기술의 범지구적 확대가 이 같은 흐름의 원동력이라고 예단했다. 무엇보다 탈집중화·탈획일화로 대표되는 ‘제3의 물결’에서는 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자유의지를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한다고 내다봤다. 토플러는 완력, 금력, 지력 3요소를 권력 구성요소로 꼽았다. 제1 물결에서는 완력, 제2 물결에서는 금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제3 물결에서는 지력이 가장 요긴하다.

                                                                                                

                                                                                 <앨빈 토플러>


 그는 정보화 사회가 20~30년 안에 실현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재택근무, 전자정보화 가정 같은 신조어도 이 책에서 처음 선보인다. 그는 정보기술이 권력을 이동시키는 것은 물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사회를 더 평등하게 만들고, 그 여파로 새로운 유토피아가 도래하리라고 낙관했다.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인 ‘프로슈머’(prosumer) 개념도 이 책에서 처음 나온다. 21세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사용한 용어다. 프로슈머는 소비는 물론 제품 생산과 판매에도 직접 관여해 해당 제품의 생산 단계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소비자의 권리를 행사한다. 시장에 나온 물건을 선택적으로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물건을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능동적 소비자 개념이다.


 그는 두뇌의 힘이 강조될수록 여성의 역할이 커지며, 지식혁명은 여성이 주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핵가족 시대에 가정의 핵심도 여성이라고 단언했다. 토플러는 문화 주도권을 잡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헤아렸다. 당시 한국과 중국이 여전히 낮은 단계의 개발도상국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아시아가 제3의 물결을 타고 유럽을 휩쓸 것이라는 견해를 21세기 10대 예측 중 하나로 내놓았다.

                                                                                                 

                                                         <톈안먼 사태 당시의 자오쯔양 중국 공산당 총서기>


  그는 새로운 전쟁의 형태도 무차별 대량 살상·파괴가 아닌 정보네트워크와 인공위성 등 첨단 디지털 무기를 기반으로 목표물만을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저강도분쟁’(低强度紛爭)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저강도분쟁은 정확한 명중률로 인명과 재산피해를 최소로 줄이면서도 주요 목표물에 필요한 만큼의 파괴력으로 정밀 타격을 가하는 형태다. 토마호크 미사일, 공중조기경보기(AWACS), 무인정찰기 등이 주축을 이룬 스마트전쟁은 불과 10년 뒤 걸프전에서 입증됐다. 토플러는 이를 ‘무기와 전쟁의 제3의 물결’이라고 명명했다.


 토플러는 21세기 미래산업으로 우주, 정보통신, 생명공학, 해양을 꼽았다. ‘제3의 물결’은 핵발전소보다 태양열이나 지열 등 다양한 에너지원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오늘날 하나의 거센 물결이 전 세계에 밀어닥치고 있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도입부를 연상케 하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정보화 사회’라는 말을 일상적 언어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책은 1980년 3월 미국에서 발표된 뒤 1990년대 초반에 이미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1천만 부 넘게 팔려 미래학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것은 영어판 출간 1년도 채 되지 않은 1981년 1월이었다. 당시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이 아닌 외국 책이 이처럼 빨리 번역 출판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대중 전대통령 내외와 함께 한 앨빈 토플러>


 그만큼 이 책이 세계 지식사회에 던진 충격은 컸다. 그가 예측한 현상이 빠짐없이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현재 진행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플러가 이 책에서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자 SF소설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이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며 이를 꼬집기도 했지만 말이다. 깁슨의 이 말은 안철수 의원이 정계에 데뷔하면서 인용해 더욱 유명해졌다.


 30여 년 전에 나온 이 책을 지금 읽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그대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토플러의 예측 능력이 탁월하다는 방증이다. 당시 세계는 저명한 하버드대 경제학자인 존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1977년 출간)라는 저작이 주목받을 만큼 앞날이 불투명했다.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은 경쟁력을 잃어가는 추세였던 반면 일본과 독일이 경제적으로 급부상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990년 이후 출판사를 경영했던 윤창 하이브레인 대표는 인터넷의 폭발적인 보급과 이와 관련한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토플러가 내다봤던 패러다임의 변화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느끼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는 고3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이 책의 실질적 미덕 가운데 하나는 저자의 현실감각과 간결한 문장, 친화력 높은 서술양식이다. 용접공, 노동조합 신문기자, 포춘지 편집자, 대학교수, 문필가 같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식이 녹아 있어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간다. 거대한 인류 문명사의 흐름을 참신한 개념, 해박한 지식, 간명한 논리, 흥미로운 사례들이 속담, 영화 같은 얘기와 버무려져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환담하는 앨빈 토플러>


 훗날 세계의 정치지도자들과 기업가들은 하나같이 이 책에서 충격을 받고 미래를 대비해 나갔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 가장 열렬한 ‘제3의 물결’ 신봉자는 공화당 출신의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이었다. 깅리치는 1995~1996년 104대 미 연방의회에서 ‘제3의 물결’을 뒷받침하는 입법 활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섰다. 깅리치 의장의 전반적인 사고체계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 토플러였다.


 이 책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중국일 가능성이 크다. 톈안먼 사태 당시 유혈진압에 반대했다가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1980년대 초 당 내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제3의 물결’ 판매금지조치를 풀어줬다. 당시 이 책은 ‘서방의 정신적 오염’으로 지목돼 중국에서 판금됐다. 중국에서 ‘개혁주의 지식인들의 바이블’로 불린 이 책은 해금 조치 이후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3의 물결’은 ‘영어 900구’와 더불어 1980년대 중국인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국도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토플러도 자신의 저서가 미국보다 중국에서 훨씬 더 잘 이해됐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아 청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이 책을 읽고 정보화에 눈을 뜨게 됐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토플러를 청와대로 초청해 그의 식견을 직접 들을 정도였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1980년대 초반 ‘제3의 물결’을 읽고 지식정보화의 미래에 대해 처음 접했다고 토로했다. 탈북자인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도 “북한에서 ‘모래시계’ 같은 남한 드라마를 봤지만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기업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훨씬 더 컸다. ‘제3의 물결’을 읽고 더없이 깊은 감명을 받은 사실을 공개한 스티브 케이스 AOA 창업자는 AOL-타임워너 합병 발표 후 회원들에게 쓴 편지에서 “세계 제1의 미디어인 타임워너와의 제휴로 여러분들은 새로운 인터넷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희망찬 포부를 천명하기도 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이 책을 19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안철수 의원의 측근인 시골의사 박경철은 이 책에서 ‘미래의 권력은 지식’이라는 대목을 읽고 마치 뒷머리에 둔기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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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000만 관객 돌파 영화 ‘변호인’에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원제 What is history?)가 불온서적인지를 놓고 검찰과 변호인 간의 공방이 벌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검사는 부림사건 피고인들이 소지한 책이 불온서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검사는 치안연구소 연구원을 ‘전문가’라며 증인으로 부른다. 이 증인은 “이 책의 전반적 흐름이 유물사관을 띠고 있으며 저자인 카는 소련에 장기 체류한 공산주의자였다”고 진술한다.

 

 이에 맞선 변호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학교에서도 이 책을 필독 권장도서로 지정했다. 게다가 카는 영국 외교관으로 소련에 체류했을 뿐이다”며 검사를 몰아세운다. 그는 이어 “영국은 카가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자 자랑스러워하는 학자라고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도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보기 바란다”는 영국 외교부 답변서를 낭독한다.

 

 영화 흥행의 부수적인 효과로 군사독재시절 대학가의 필독서였던 ‘역사란 무엇인가’는 한동안 서점가에서 새삼스레 바람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이 말을 자주 인용할 만큼 명언이다. 카는 이 말에 앞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역사가는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한다. 둘 중 어느 한쪽에 우위를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데없는 존재다. 자신의 역사가를 갖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이 명제는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역사가의 해석이 있어야만 역사적 사실이 성립한다는 말과 같다. 역사가의 해석은 자신의 현재 입장과 가치관의 반영이다. 이러한 시각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의 실증사학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랑케의 역사철학은 ‘역사가의 과제는 단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면서 사료의 개념을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객관적으로 저술하는 게 랑케의 지론이다.

                                                                 

                                                                                   <E.H. 카>

 

  랑케가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역사가의 임무’라고 한데 반해, 카는 “사실은 스스로 말하는 게 아니라 역사가가 말을 걸 때만 말한다”고 반론을 편다. 카는 역사적인 사료 가운데서 골라내 가위로 잘라내고 그 부분을 풀로 붙여내는 것과 같은 ‘가위와 풀의 역사’에 반대한다.

 

   카는 “완전한 객관적 실증주의란 불가능하다”면서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는 고전학자 알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의 명언을 인용한다. 동시에 현재의 목적을 위해 과거 사실을 주관적으로 왜곡하는 오류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카는 실증주의 역사학의 사실 숭배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가위와 풀의 역사’라고 불렀지만, 역사 연구의 기초적인 과정을 무시하거나 오롯이 부정하려는 뜻은 없다. ‘가위와 풀’이 역사 연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란 현재의 역사”라고 규정했다. 영국 역사가 로빈 조지 콜링우드도 “역사가는 현재의 아들”이라며 역사를 역사적 인물들의 생각을 재수집한 것이라고 했다.

                                                                   

                                                       <레오폴트 폰 랑케>

 

  카는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따른다. 그는 사실과 주관이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며, 역사는 역사가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을 뽑아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 사실을 해석할 때 사실은 사라지고 해석만 남게 되는 허무주의적 결론도 경계했다.

 

  카는 역사가를 흥미롭게 비유한다. “역사가란 높은 절벽 위의 독수리나 사열대에 앉은 귀빈처럼 행진하는 대열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단지 행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묵묵히 걸어가는 희미한 존재일 뿐이다.” 역사학이란 역사의 일부일 뿐이어서 역사학의 변화는 역사적 사실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뜻이다.

 

  저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 부분에 있었던 더 게 아닌가 싶다. “역사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닌 기존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진보했다.” 그는 19세기식 단선적 진보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그는 “진보는 만인에게 평등하고 동시적인 진보를 의미하지 않으며, 또 그러한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며 비연속적인 진보를 주장한다. 그가 연 새로운 지평은 역사가에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요구하는 동시에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비중을 둔다. 그는 “역사에서 절대자는 과거나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쪽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미래에 있다”고 말한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이 책의 테제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게 하나이고, ‘역사는 과학이다’라는 것이 다른 하나다. 역사가들이 연구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는 유사성이 크다고 한다. 카가 역사를 과학이라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학’과 ‘진보’는 근대의 전형적인 거대담론이 됐다. 그는 또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고 주문한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카는 ‘왜 역사는 영웅만을 기억하는가’라는 문제에도 혜안을 제시했다. 영웅을 하나의 사회 현상이자 한 시대를 보여주는 대변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인물이란 특출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일정한 사회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위대한 인물은 항상 현존하는 세력의 대표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방법을 통해 그가 그 창조를 돕는 세력의 대표자일 것이다.” 영웅을 추앙하기 위해서 기억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사회 현상이자 대변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많은 역사가의 동의를 얻어냈다. 영웅 한 사람이 역사를 바꿔 버렸다는 영웅주의 논리는 자연스레 힘을 잃기 시작했다.

                                                                     

                                                        <베네데토 크로체>

   이 책은 카가 1961년 케임브리지대에서 6차례 연속으로 진행한 강연을 엮은 것이다. 당시 유럽의 역사학은 회의와 불신의 늪에 빠져 있었다. 1, 2차 세계대전,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혁명, 미·소 냉전의 개시 같은 사건을 겪은 후 유럽은 자신들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잃었다고 느꼈던 탓이다. 진보에 대한 신념 역시 흔들렸다. 카는 진보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영국 사회에 희망을 주려했다.

 

   역사의 본질을 묻는 역사철학서인 ‘역사란 무엇인가’가 나오자 20세기 역사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 책은 영국과 미국의 역사학·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으려는 지식인들에게 이 책은 전범(典範)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역사학 이론서로 자리 잡았음은 물론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장착한 이 책은 1960∼1980년대 세계 각국에서 번역·출판돼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장 큰 파장을 낳은 곳은 저자의 모국인 영국과 유럽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1970년대 유신체제와 1980년대 군부독재체제를 거치면서 사회 변혁운동에 온몸을 던졌던 청년들에게는 이 책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한여름의 소낙비와 같았다.

 

  무엇보다 386세대(지금은 486세대라 부른다)를 키운 공로자 가운데 하나가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은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 운동권에서 의식화를 위한 필수 교재로 사용된 것은 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이 책은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역사학 입문서이면서 역사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은 우리나라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다.

 

 이 책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공감을 표시한 대목도 군데군데 나온다. 군사독재정권은 이 책을 금서로 묶는 명분을 여기서 찾았다. 카는 ‘소비에트 러시아 역사’라는 불후의 저작을 남기고 한때 친소비에트·스탈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엄격하게 말해 공산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삼은 엄격한 리얼리스트였다. 그는 국제정치에서 이상주의나 자유주의의 허약한 인식을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공박하곤 했다. 이 때문에 좌·우파 양쪽으로부터 공격 받았다. 카는 19세기 역사학계 주류였던 랑케의 실증주의 학풍과 이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빌헬름 딜타이, 크로체, 콜링우드의 주관주의 학풍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한 역사학자로 평가받는다.

                                                                   

 세월이 흐르자 카의 역사관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나온다. ‘진보로서의 역사’와 ‘과학으로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카의 역사인식이 궤도수정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학에서는 과학성보다 문학성이 더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굿바이 E. H. 카’(원제 What is History Now?)라는 책은 ‘역사란 무엇인가’ 발간 40주년을 기념해 런던에서 열린 학술회의의 산물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종교사·문화사·지성사·제국사·여성사·젠더사 같은 미시사가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그렇지만 카의 거대담론은 여전히 쉽게 허물 수 없을 만큼 우뚝하다. ‘굿바이 E. H. 카’라는 번역 제목과는 달리 카의 이론을 뛰어넘을 만한 내용은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의 학문적 산맥이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10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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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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