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비령’의 작가 이순원의 회상은 황혼이 깃들어서야 날개를 펴기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미국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원제 The Third Wave)에서 예고한 ‘정보화 사회’란 말에서 맨 먼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를 연상했다고 털어놨다. ‘정보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말이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과 겹쳤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 ‘안기부’가 국가최고 권력기관으로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다. 정보라는 말을 놓고 책을 통해서는 ‘토플러의 정보’로 읽고, 현실로는 오웰의 ‘빅 브라더의 정보’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한국엔 전화가 없는 집이 더 많았고, 복사기나 팩시밀리를 구경하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던 시절이었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 토플러가 1970년 ‘미래의 충격’에 이어 1980년에 ‘제3의 물결’을 막 출간했을 때까지만 해도 지적 유희나 꿈을 얘기하는 학자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 강단의 학자들은 대부분 미래학을 과학적 방법론을 장착하지 못한 ‘무늬만 사회과학’일뿐이라고 폄훼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예견했던 일들이 가시화하자 세계는 찬탄해 마지않았다. 미래학을 업신여기던 많은 학자들이 입을 다물었음은 물론이다.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의미 없는 사건의 연속처럼 여겨지는 세계사의 파도에도 일관된 흐름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제1의 물결’인 농업사회, ‘제2의 물결’인 산업사회를 거쳐 ‘제3의 물결’인 정보화 사회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제1의 물결’은 1만 여년 동안 자급자족체제를 인류에게 가져다 줬으나 굶주림과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게 했다. 그 같은 한계로 말미암아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 ‘제2의 물결’에게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만다.

 

  하지만 ‘제2의 물결’도 인류에게 질곡을 안겼다. 산업사회는 표준화·세분화·동시화·집중화·극대화·중앙집권화로 인해 인간을 소외된 존재로 전락시킨 탓이다. 대량생산·대중소비·국가중심 경제체제를 지닌 ‘제2의 물결’의 산업사회는 소량 고부가가치 유연생산·다핵화·범지구적 경체제제를 지닌 ‘제3의 물결’의 정보화 사회로 흘러가는 것이 세계사의 도도한 추세라고 토플러는 예언했다.


 그는 지식집약적 생산기술의 등장과 정보처리 전달기술의 범지구적 확대가 이 같은 흐름의 원동력이라고 예단했다. 무엇보다 탈집중화·탈획일화로 대표되는 ‘제3의 물결’에서는 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자유의지를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한다고 내다봤다. 토플러는 완력, 금력, 지력 3요소를 권력 구성요소로 꼽았다. 제1 물결에서는 완력, 제2 물결에서는 금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제3 물결에서는 지력이 가장 요긴하다.

                                                                                                

                                                                                 <앨빈 토플러>


 그는 정보화 사회가 20~30년 안에 실현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재택근무, 전자정보화 가정 같은 신조어도 이 책에서 처음 선보인다. 그는 정보기술이 권력을 이동시키는 것은 물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사회를 더 평등하게 만들고, 그 여파로 새로운 유토피아가 도래하리라고 낙관했다.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인 ‘프로슈머’(prosumer) 개념도 이 책에서 처음 나온다. 21세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사용한 용어다. 프로슈머는 소비는 물론 제품 생산과 판매에도 직접 관여해 해당 제품의 생산 단계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소비자의 권리를 행사한다. 시장에 나온 물건을 선택적으로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물건을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능동적 소비자 개념이다.


 그는 두뇌의 힘이 강조될수록 여성의 역할이 커지며, 지식혁명은 여성이 주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핵가족 시대에 가정의 핵심도 여성이라고 단언했다. 토플러는 문화 주도권을 잡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헤아렸다. 당시 한국과 중국이 여전히 낮은 단계의 개발도상국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아시아가 제3의 물결을 타고 유럽을 휩쓸 것이라는 견해를 21세기 10대 예측 중 하나로 내놓았다.

                                                                                                 

                                                         <톈안먼 사태 당시의 자오쯔양 중국 공산당 총서기>


  그는 새로운 전쟁의 형태도 무차별 대량 살상·파괴가 아닌 정보네트워크와 인공위성 등 첨단 디지털 무기를 기반으로 목표물만을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저강도분쟁’(低强度紛爭)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저강도분쟁은 정확한 명중률로 인명과 재산피해를 최소로 줄이면서도 주요 목표물에 필요한 만큼의 파괴력으로 정밀 타격을 가하는 형태다. 토마호크 미사일, 공중조기경보기(AWACS), 무인정찰기 등이 주축을 이룬 스마트전쟁은 불과 10년 뒤 걸프전에서 입증됐다. 토플러는 이를 ‘무기와 전쟁의 제3의 물결’이라고 명명했다.


 토플러는 21세기 미래산업으로 우주, 정보통신, 생명공학, 해양을 꼽았다. ‘제3의 물결’은 핵발전소보다 태양열이나 지열 등 다양한 에너지원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오늘날 하나의 거센 물결이 전 세계에 밀어닥치고 있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도입부를 연상케 하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정보화 사회’라는 말을 일상적 언어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책은 1980년 3월 미국에서 발표된 뒤 1990년대 초반에 이미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1천만 부 넘게 팔려 미래학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것은 영어판 출간 1년도 채 되지 않은 1981년 1월이었다. 당시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이 아닌 외국 책이 이처럼 빨리 번역 출판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대중 전대통령 내외와 함께 한 앨빈 토플러>


 그만큼 이 책이 세계 지식사회에 던진 충격은 컸다. 그가 예측한 현상이 빠짐없이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현재 진행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플러가 이 책에서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자 SF소설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이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며 이를 꼬집기도 했지만 말이다. 깁슨의 이 말은 안철수 의원이 정계에 데뷔하면서 인용해 더욱 유명해졌다.


 30여 년 전에 나온 이 책을 지금 읽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그대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토플러의 예측 능력이 탁월하다는 방증이다. 당시 세계는 저명한 하버드대 경제학자인 존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1977년 출간)라는 저작이 주목받을 만큼 앞날이 불투명했다.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은 경쟁력을 잃어가는 추세였던 반면 일본과 독일이 경제적으로 급부상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990년 이후 출판사를 경영했던 윤창 하이브레인 대표는 인터넷의 폭발적인 보급과 이와 관련한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토플러가 내다봤던 패러다임의 변화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느끼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는 고3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이 책의 실질적 미덕 가운데 하나는 저자의 현실감각과 간결한 문장, 친화력 높은 서술양식이다. 용접공, 노동조합 신문기자, 포춘지 편집자, 대학교수, 문필가 같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식이 녹아 있어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간다. 거대한 인류 문명사의 흐름을 참신한 개념, 해박한 지식, 간명한 논리, 흥미로운 사례들이 속담, 영화 같은 얘기와 버무려져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환담하는 앨빈 토플러>


 훗날 세계의 정치지도자들과 기업가들은 하나같이 이 책에서 충격을 받고 미래를 대비해 나갔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 가장 열렬한 ‘제3의 물결’ 신봉자는 공화당 출신의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이었다. 깅리치는 1995~1996년 104대 미 연방의회에서 ‘제3의 물결’을 뒷받침하는 입법 활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섰다. 깅리치 의장의 전반적인 사고체계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 토플러였다.


 이 책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중국일 가능성이 크다. 톈안먼 사태 당시 유혈진압에 반대했다가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1980년대 초 당 내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제3의 물결’ 판매금지조치를 풀어줬다. 당시 이 책은 ‘서방의 정신적 오염’으로 지목돼 중국에서 판금됐다. 중국에서 ‘개혁주의 지식인들의 바이블’로 불린 이 책은 해금 조치 이후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3의 물결’은 ‘영어 900구’와 더불어 1980년대 중국인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국도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토플러도 자신의 저서가 미국보다 중국에서 훨씬 더 잘 이해됐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아 청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이 책을 읽고 정보화에 눈을 뜨게 됐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토플러를 청와대로 초청해 그의 식견을 직접 들을 정도였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1980년대 초반 ‘제3의 물결’을 읽고 지식정보화의 미래에 대해 처음 접했다고 토로했다. 탈북자인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도 “북한에서 ‘모래시계’ 같은 남한 드라마를 봤지만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기업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훨씬 더 컸다. ‘제3의 물결’을 읽고 더없이 깊은 감명을 받은 사실을 공개한 스티브 케이스 AOA 창업자는 AOL-타임워너 합병 발표 후 회원들에게 쓴 편지에서 “세계 제1의 미디어인 타임워너와의 제휴로 여러분들은 새로운 인터넷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희망찬 포부를 천명하기도 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이 책을 19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안철수 의원의 측근인 시골의사 박경철은 이 책에서 ‘미래의 권력은 지식’이라는 대목을 읽고 마치 뒷머리에 둔기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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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