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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배신의 정치, 신의의 정치

 시청률이 떨어지면 ‘배신’이라는 특효약을 처방하라는 신화가 살아있는 곳이 드라마 제작 세계라고 한다. 역대 한국 드라마 시청률 1위(65.8%)를 기록한 ‘첫사랑’은 두 형제와 한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랑과 배신, 음모를 다룬 멜로드라마다. 역대 시청률 5위 기록(62.7%)을 지닌 같은 작가의 ‘젊은이의 양지’도 세 젊은이들의 사랑과 야망, 배신을 그린 드라마다.

 

   남미 전역의 최고 인기 드라마 ‘이브의 복수’가 한국에 수입된 까닭도 사랑과 배신이 질펀하게 녹아 있는 스토리 덕분이었다. 시청률에 목을 매는 드라마 촬영 현실을 풍자한 개그콘서트 코너 ‘시청률의 제왕’에서도 빠지지 않았던 게 ‘배신’ 코드다.


 보수 야당 지도자가 지난 대통령 선거 때부터 엊그제까지 줄기차게 동원하는 ‘배신의 정치’ 프레임은 유권자들의 드라마 심리를 파고드는 기제의 하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등록상표나 다름없었던 ‘배신자’ 낙인찍기 정치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다른 차원에서 물려받아 벤치마킹하는 듯하다.

                                                                    

 

  홍 대표는 지난 주말(25일)에도 예외 없이 배신자 사냥에 나섰다. 희생양은 바른정당으로 당적을 옮긴 남경필 경기도지사다. 그것도 남 지사의 홈그라운드인 경기도 수원시 광교공원에서 열린 ‘2018 지방선거 필승 결의 및 자연보호 등반대회’에서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배신자 남경필’ 대신 새로운 적임자를 보내겠다는 선전포고였다.


 홍 대표는 바른정당 유승민 대표가 선출된 직후인 지난 14일 인사차 예방하겠다고 했을 때도 ‘배신자’ 코드로 독살스럽게 거절했다. “바른정당은 배신자 집단이지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예방을 거절한다.” 그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그랬고, 선거 후 당 대표가 된 뒤에도 배신자 프레임을 단 한 번도 풀지 않았다. “TK(대구경북) 민심은 살인범을 용서할 수가 있어도 배신자들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다”며 바른정당에 배신자 프레임을 한껏 덧씌웠다.


 배신자 낙인은 교묘한 정치 행위다. 배신 낙인에 반드시 따라붙는 게 ‘응징’이다. 홍 대표의 집요한 배신자 낙인찍기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혁보수를 표방하는 바른정당 숨통끊기 작전의 동의어나 다름없다. 바른정당 고사 전략을 통해 사실상 보수 통합 효과를 끌어내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역설적인 것은 배신자 무기를 남용하는 홍 대표 자신이 배신자로 몰리고 있는 부메랑 현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 이후 최근 대구에 간 홍 대표는 친박 지지자들로부터 “배신자 홍준표, 대구를 떠나라”는 막말을 들어야 했다. 박근혜 지지자들은 홍 대표가 했던 말을 한 치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돌려줬다. “살인자는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대구의 민심이다.”

                                                                             


 ‘배신’이란 낱말이 최근 수년 동안 보수 정치판에서만 주로 쓰인다는 점이 별스럽다. 드라마 시청률이 그렇듯이 ‘배신’ 코드를 상용(常用)하면 홍준표 대표와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올라갈지 궁금하다. 여론조사를 보면 약효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배신에 대한 판단은 획일적이지 않다. 특정인의 눈에는 배신자여도 다중의 눈에는 의인으로 비치곤 한다. 배신으로 보이는 행위를 했어도 역사적 관점에선 배신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배신-인간은 왜 믿음을 저버리는가’의 저자 아비샤이 마갈릿 히브리대 사회학 교수는 역사적 사례로 이를 보여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는 흑인인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힘을 합해 뿌리 깊은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해 배신의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인류애로 보면 그를 배신자로 규정하는 게 어불성설이다. 샤를르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이 알제리에서 거주하는 프랑스인들과 프랑스 군부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알제리의 독립을 선언한 일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 국회 탄핵소추 의결’ 때 찬성표를 던진 새누리당 의원들이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에게는 배신자일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전체로 보면 정반대인 것도 그렇다.


 정치인의 가장 나쁜 배신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국민대통합을 철석같이 공약하고서도 자기편 국민만 챙기고 생각이 다른 국민을 억압한 지도자라면 국민을 배신한 것과 같다. 헌법재판소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파면을 선고하면서 국민 신의를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홍준표 대표 역시 정치적 계산에 따른 언행일지라도 국민에 대한 배신을 먼저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