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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대담한 진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것’이란 말은 형용모순에 가깝다. 가장 진보적인 것과 받아들 수 있는 것은 충돌하기 십상이어서다. ‘둥근 사각형’, ‘달콤한 슬픔’,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명제다.


 ‘산업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레이먼드 로위는 모순되는 두 가지의 놀라운 조합을 디자인 철학으로 승화시킨 대가다. 로위의 핵심 디자인 이론은 ‘마야 법칙’이라 불린다. 스스로 만든 조어 ‘마야(MAYA)’는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진보적인(most advanced yet acceptable)’이라는 뜻을 지녔다. 마야 법칙은 새로움이 주는 놀라움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중 정서를 꿰뚫어 본다.


 오랫동안 명성이 자자한 코카콜라 병을 비롯해 물방울 연필깎이, 빌딩, 자동차, 우주선까지 로위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이 없을 정도다. 미국 어딜 가든 로위의 디자인과 마주치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다는 시절이 있었다. 로위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톺아내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그는 ‘놀라움은 익숙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심리학적 연구 결과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이미 이를 통찰했다.

                                                                                     


 한 나라의 정책도 상품 디자인과 흡사한 정서가 깃들어 있다. 선택 상황에서 소비자가 그렇듯이 국민도 새로운 것에 대한 매력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너무 과감하거나 낯설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인 정책이 매력적이면서도 강력한 저항을 함께 받는 것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개혁정책은 첨예한 갈등 요소를 지니고 있는 사안이 많다.


 비정규직 제로화 정책은 곳곳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해 이상과 현실의 격차가 도드라져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공항공사를 찾아가 비정규직 제로화를 천명할 정도로 확연한 목표를 제시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피해를 적지 않게 낳고 있다. 교육부문의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실패처럼 노노갈등의 결과가 심상치 않은 부문이 많다.

 

  아웃소싱(외부위탁)과 정규직 전환에 따른 문제점 역시 ‘정규직화의 역설’ 현상의 하나로 드러난다. 일률적인 정규직화 정책으로 2만여 아웃소싱 업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제로화가 문재인 정부가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일자리 창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둘러싼 논란도 풀기 어려운 숙제로 부상했다.  

                                                                                               

                                                                          
 새해부터 적용되는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 해소도 만만찮은 과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노동자들의 일터가 없어진다면 취지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분 중 일부를 지원한다지만 현장의 반응이 그리 호의적인 편은 아니다. 업무 자동화를 통한 직원 감원, 근무시간 축소, 가족경영 확대, 공장 해외이전, 상품가격 인상 등 인건비 폭증을 피하기 위한 갖가지 방편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핵심 개혁의 하나인 탈 원전 정책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것은 ‘친숙한 놀라움’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이 선뜻 수용하기엔 정책 추진 속도가 급격하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상반되는 정책의 실천적 대안 제시가 만족스럽지 않은 가운데 추진되고 있어서다.

 

  탈 원전의 4대 부작용으로 세계 기후변화 정책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 문제, 전기요금 상승, 전력안보 위협, 원전산업 붕괴가 손꼽힌다. 현 정부가 탈 원전 정책에서 남북통일이 될 경우 전력 수급 문제는 아예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도 찬반이 날카롭게 대립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까지 개혁 드라이브를 걸면서 반발을 무마해야하는 난제가 적지 않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끝내고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 추진과정에서 풀어야 할 커다란 장애물의 하나다.


 탈 원전, 비정규직 해소, 최저임금 인상 같은 진보적인 정책은 시대의 흐름임에 분명하다. 개혁 정책에 실천이 담보되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진보적 상품’으로 만드는 게 선결과제다. 정부가 2017년을 마무리하면서 개혁 정책을 이런 관점에서 점검해 보면 좋겠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