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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육당·춘원문학상을 제정해선 안 되는 까닭

 

 육당 최남선이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서슴지 않자, 위당 정인보는 상복을 입고 절친인 그의 집을 찾아갔다. “내 친구 육당은 이제 죽었구나!” 하며 그의 집 앞에서 통곡했다. 그 뒤 최남선이 겉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찾아오자 정인보는 반색을 하고 설렁탕을 사줬다.

 

  하지만 최남선의 친일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줄기차게 일제의 탄압에 저항해온 정인보는 어느 날 최남선이 자기 집에 들렀지만 정색을 하며 무시했다. “혼을 판 학자에게는 냉수 한 그릇도 아까운 법일세.”


 최남선의 친일행적은 춘원 이광수와 더불어 우리의 근대 지성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이다. 최남선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대학 강당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도들이여, 성전(태평양전쟁)에 나서라’라고 촉구하는 연설을 하는 등 온갖 친일행위를 일삼았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로서 친일 엘리트 양성에 앞장섰다. 일제 어용역사단체인 조선사편수위원회에도 참여해 역사왜곡과 식민사학 수립에 협력했다.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일컬어진 이광수의 친일행각은 최남선보다 몇 곱절 뛰어넘는다. 이광수는 창씨개명령이 내려진 바로 다음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한 후 이렇게 외쳤다.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적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매일신보 1940년9월4일)

 

  이광수는 신문, 잡지에 기고한 시·소설·평론·수필·르포 같은 글로 일본 천황을 숭앙하고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최남선처럼 조선청년들의 징병, 학병 지원을 강권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문학평론가이자 이광수·최남선 연구자인 서영채 한신대 교수는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특급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두 사람을 ‘일그러진 윤리적 괴물’로 규정한다. 두 인물의 친일 행적만 모아도 전집을 낼 수 있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을 기리기 위해 1만3000여명을 회원으로 둔 국내 최대 문인단체인 한국문인협회가 ‘육당문학상’과 ‘춘원문학상’을 제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어이없다. 반민족 친일 지식인의 문학 업적을 인정하는 것과 그들을 기려 상을 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들의 친일행적은 일본의 회유에 의한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신념에 따라, 그것도 20년간 일제의 민족탄압에 협력한 인물이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주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예를 들며 ‘근대문학의 아버지’인 육당과 춘원의 업적을 기려야한다는 주장도 한다. 그렇지만 파운드가 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로 가 파시즘을 지지하는 방송을 한 행위와 우리의 두 문인이 저지른 반민족행위는 체급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프랑스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부역한 문학인과 언론인 7명을 사형에 처한 사례와 비교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관대했다. 프랑스에서는 각계 인사들의 탄원서도 통하지 않았던 반면, 한국은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됐음에도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다른 분야의 친일인사는 물론 친일 문인을 엄중하게 단죄하지 않았다. 


 육당·춘원 문학상 제정을 처음 제안했다는 문효치 문인협회 이사장이 민족반역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이 상의 순수성을 더욱 의심스럽게 한다. 문 이사장의 증조부 문종구는 최남선과 같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족반역자다.  


 육당·춘원 문학상을 제정하는 것은 단발성 사안이 아니어서 한층 심각하다. 박근혜 정부 이후 친일 문제에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물타기하는 불온한 시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족반역 친일인사의 후손인 이인호 KBS이사장이 얼마 전 친일 기득권층의 잇달아 옹호한 일도 마찬가지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같은 맥락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일제에 아부하며 살았던 비열한 문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상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름의 경지를 이룬 문인들이 이런 상을 자랑스럽게 받는 게 정상일까? 300개가 넘는 우리나라 문학상이 부족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 한국문인협회는 그 뒤 육당 춘원 문학상 제정을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