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의 초상이 담긴 5천원권 지폐가 1972년 처음 발행되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율곡의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도 오뚝해 서양사람 같다는 비판이 일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기술 부족으로 화폐의 원판 제작을 외국에 맡겨야 했다. 이를 대행했던 영국의 토머스 데라루 사가 은연중에 서양인 얼굴을 닮은 율곡을 만든 것이다. 그렇잖아도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나 영정을 제작할 때마다 모습이 차이가 나 물의를 빚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정부는 1973년 선현(先賢)의 동상 건립과 영정 제작 때 표준영정만 사용하도록 제도화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윤주영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지시하는 형식을 취했음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문화공보부는 ‘동상·영정심의위원회’를 만들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표준 초상화를 제작했다. 5천원권의 율곡 초상은 1977년 이종상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으로 바뀌었다.

                                                                                               

                                                          <친일화가 월전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정부는 1970~80년대 가장 명성 높은 화가들에게 표준영정 제작 대부분을 맡겼다. 일단락된 것 같던 표준영정은 민주화 이후 제작 화가들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특히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거나 옹호하는 데 앞장섰던 화가들이 독립운동가들의 표준영정을 그린 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여론이 거세졌다. 세종대왕처럼 독립운동가가 아닌 선현들의 표준영정도 친일화가들이 그린 것은 교체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광복 60주년인 2005년 처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93편의 표준영정 가운데 15퍼센트가 친일화가의 작품이라고 통계까지 밝혔다.


 가장 먼저 교체대상으로 거론된 표준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이순신 장군이다. 장우성은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와 더불어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됐다. 교체여론이 일자 정부는 가장 민감했던 유관순 표준영정을 2007년 3·1절과 때를 맞춰 윤여환 충남대 교수의 작품으로 바꿨다.

                                                                                               

                           10월26일 충남 아산시 현충사 앞에서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시민들은 서명에 참여하고 있다. <자료사진> 


 이순신의 경우 최근 들어 다시 교체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영화 ‘명량’이 누적관객 역대 1위를 기록한 것을 계기로 삼아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을 교체해야 한다는 운동을 지난 주말부터 시작했다. 한 야당의원도 최근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환기시켰다. 


 정부는 “작가의 친일 논란은 문화체육관광부 동상영정심의규정 제5조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지정해제 사유로 보기 어렵다”고 해당 국회의원에게 서면 답변했다고 한다. 국가 차원에서 친일파로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표준 영정의 지정 해지를 심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편찬한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에 구체적 친일행위를 증거물과 함께 명확하게 밝혀놓은 인물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확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법부까지 장우성 후손들이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낸 ‘친일인명사전 발행 및 게시 금지 가처분 신청’을 2009년 모두 기각한 바 있다.

                                                                                         

                                    <5천원권에 담긴 율곡 이이 초상화. 위는 1972년 초판, 아래는 1977년 제작 표준영정>


 임진왜란을 평정한 이순신의 표준영정을 친일작가의 작품으로 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게다가 친일작가의 후손들이 저작권료를 챙기는 걸 방치하는 일도 합당하지 못하다. 이순신의 표준영정은 1973년 맨 처음 지정됐다는 상징성도 크다.


 유관순 사례에 비춰보면 충남 예산군 충의사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표준영정 교체도 실행해야 마땅하다. 지정 당시 친일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못한 과실을 뒤늦게라도 깨달았다면 시정하는 것이 옳다. 이런저런 핑계로 거부하는 것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이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선현의 표준영정에는 민족의 혼과 정기가 담겼다. 표준영정은 동상과 지폐, 우표 등의 제작은 물론 교과서에도 실린다. 문교부(현 교육부)가 1982년 전국 초·중·고교에 배포한 ‘학생독서지도 도서목록’에 일본인 야마베 건타로가 쓴 ‘한일합병사’와 고미카와 준페이의 일본소설 ‘인간의 조건’ 등 부적절한 책을 포함시켰다가 담당 공무원이 직위해제된 사례도 있었음을 떠올려보라.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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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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