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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전투에선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지도자라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평생 잊지 않고 실천한 지도자다. 만델라는 1994년 실시된 남아공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하자마자 지긋지긋한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를 청산하고 흑백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게 조국의 최급선무라는 목표를 명확히 설정했다. 백인 정권과의 투쟁과정에서 처절했던 27년간의 감옥살이는 잊었다.


 그는 전환점을 이듬해 6월 자국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대회로 잡았다. 럭비는 남아공에서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었다. 때마침 남아공과 뉴질랜드가 월드컵 결승에서 맞붙었다. 만델라가 백인 문화의 상징인 럭비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럭비대표팀의 별칭 ‘스프링복스’ 유니폼인 녹색·황금색 줄무늬 셔츠를 입은 만델라가 필드에 등장하자 거의 모두가 백인이었던 관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6만2천명의 관중이 일제히 “넬슨! 넬슨!”을 외쳤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방송을 시청하던 국민도 흑백을 가리지 않고 눈시울을 붉혔다. 스프링복스도 응원 덕분에 우승트로피를 안았다. 그때부터 흑백 간에 용서와 화해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늘 작은 전투에서는 지는척했다. 소탐대실하지 않기 위해서다.

                                                                                          

                                                       <럭비 월드컵경기장에 나타난 넬슨 만델라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은 만델라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당선 2주년이 가까워 오지만 여전히 야당이나 비판적인 국민, 심지어 새누리당 후계자들과의 권력게임에서 이기는 ‘전투’에만 매달려 있는 듯하다. 이 때문에 집권 초기 나라의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숙제를 잊어버리고 허둥대는 모습이 역력하다. 대선 당시 세워놓은 국정 철학과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박 대통령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워 황금시간인 1년을 허송세월했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문제가 불거지자 정권의 정통성을 지레 걱정한 탓에 엉뚱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북방한계선(NLL) 포기발언 공방으로 소중하기 짝이 없는 1년 동안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친노무현 세력의 기세를 꺾겠다는 의도로 맞불을 놓았지만, 포기발언은 없었다는 허무한 결론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권의 잘못으로 돌리고 국정원개혁을 선택하는 게 전략적으로 바른 방향임에도 긁어부스럼을 만든 셈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정권과 비교할 수 없는 인사 참사로 몇 달 동안 국정 정상화가 어려웠던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집권 2년차에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려 했으나 정권 스스로 연초부터 강조한 안전사고예방은커녕 참사가 터져 반년 가까이 국정 마비상태에 빠졌다. 세월호 참사만 해도 대통령이 좀 더 따뜻한 가슴으로 다가갔다면 국민을 이처럼 갈가리 찢어놓지는 않았을 게다.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는 핑계를 대지만, 박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로 있던 야당에 비해 투쟁력이 한참 떨어질 만큼 지리멸렬하다. 

                                                                                                   

                                                                          <넬슨 만델라 광장>


 권력관리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통령 밑에는 심기관리에 눈치를 살피는 참모들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이 어느 때보다 복잡미묘하게 국제정치판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지만, 거대한 체스판을 읽어내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대전략가는 보이지 않는다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걱정한다. 통일대박 운운하면서도 막상 남북대화나 통일의 다리를 놓는 노력은 후퇴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경제도 어딜 보나 가슴이 답답한 실정이다. 하늘처럼 믿고 쳐다보던 삼성과 현대자동차마저 앞날이 불투명하다. 대선 공약의 절반만 실천해도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많으나, 돈이 들어가는 정책이 아닌 것조차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무시해버린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청와대에서는 낡은 시대의 발상과 형식적 의전 행사가 주류를 이룬다.


 대통령의 가장 큰 목표는 항상 국민 전체와 국가의 미래에 둬야 한다. 미래와의 전쟁 과정에서 야당과 비판세력을 제어하는 일은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아니 이들과 함께 가야 성공하는 대통령이 된다. 남은 3년여만이라도 작은 전투의 승리보다 국가 장래와의 전쟁에 방점을 찍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 칼럼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