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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권력 해바라기 친일파 후손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고 떵떵거리며 살았던 인물 가운데 대부분이 노론파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일강제병합의 공로로 일본 귀족작위를 얻은 76명 중 조선 왕실 인사 등을 제외하고,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인물은 64명이다. 이 가운데 북인이 2명, 소론 6명, 나머지 56명은 이완용을 비롯해 모두 노론파다. 주로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남인은 한 사람도 없다.

 
 노론파는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조선귀족열전’에서 이 같은 사실을 자랑까지 한다. 조선 후기 내내 집권세력이었던 노론파는 권력의 끈을 놓치기 싫어 매국도 서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훗날 독립운동에서도 남인 학맥의 중심지였던 안동지역 인물들과 소론파가 많았던 반면, 노론파에서는 항일운동가가 단 한명도 배출되지 않았던 점이 눈길을 끌만한 현상 가운데 하나다.


 해방 이후 다수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보여주는 권력 해바라기 성향도 노론파와 다르지 않다. 친일파 청산을 무산시킨 이승만 정권과 군사독재정권 시절은 물론 민주화 운동을 겪은 이후에도 역사의 물레방아를 거꾸로 돌리려는 음모는 친일파 후손들의 집요한 권력 해바라기 성향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선 친일파 후손들과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뉴라이트의 오기가 한층 드세졌다.

                                                                                           


 최근 이인호 KBS 이사장 임명과 후속 파문이 전형적인 사례다. 당사자의 반성은커녕 역사왜곡과 견강부회에다 주변의 궤변 엄호까지 보태지는 걸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의 조부 이명세가 조선 유림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의 상무이사를 지내 이명박 대통령의 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704명의 명단에 등재된,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상태다.

 

   이 이사장의 해명이 더 가관이다.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일제 통치 체제하에서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며,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 그의 변명은 ‘친일파 옹호 10대 궤변’ 가운데 ‘공범론’(共犯論)에 해당한다.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지조를 지킨 정인보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지하에서 통탄할 일이다.

                                                                                            

                                                              <이인호 KBS이사장 자료사진>


   이 이사장은 자신의 역사관 비판에 대해 ‘편향된 운동권 교육을 받은 일부 정치인·교사·교수·언론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 때문’이라며 특유의 ‘색깔론’으로 변질시켰다. 색깔론은 ‘10대 궤변’ 중 가장 악랄한 반격무기다. 그가 지난 주 전경련 강연에서 해방 직후의 친일파 청산 노력을 ‘소련의 지령’이라고까지 공격한 것은 색깔론에다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이 더한 ‘궤변 중의 궤변’이다.


  그를 엄호 사격하는 여권 지도부와 일부 언론의 ‘연좌제’ 논리도 허무맹랑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군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할아버지가 친일 인사이고, 그 손녀를 친일의 후예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사실상 연좌제”라고 주장한다. ‘연좌제 부활론’ 역시 ‘10대 궤변’에 속한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연좌제 반대론은 친일파 후손이 조상들과 다름없는 언행을 거리낌 없이 한다면 설득력이 전혀 없다. 이 이사장이야말로 친일 미화로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던 ‘교학사’ 교과서를 적극 지지하는 대표적인 친일 뉴라이트 인사다. 


 한 언론인은 극우 아베 정권이 활개를 치고 인기 작가 시오노 나나미까지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정하는 마당에 ‘친일유령’을 불러들이는 건 스스로의 역사에 침 뱉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야말로 ‘10대 궤변’ 가운데 하나인 ‘국론분열론’에 해당한다.

                                                                                         

                                                                        <손문상 화백 만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대다수가 어려운 형편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힘겹게 사는 반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늘 권력 주변에서 지도층입네 하고 호의호식하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합리적 보수주의자인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할 이들은 바로 박근혜 정부와 친일 엄호론자들이다. “분단의 현실에서 지도층의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노론파 후예, 친일파 후예들이 그대로 있어 해방된 조국의 이미지 쇄신이 없었고 사대주의적 피가 흘러 민중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부와 권력 유지에 우선하고 있다.”

 

 ※※※ 친일파 옹호자들이 적어도 열 가지의 궤변을 동원하고 있다는 연구 자료도 나와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당시 상임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10대 궤변’을 간추리면 이렇다. (1)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집단은 빨갱이라는 ‘색깔론’, (2) 과거의 일이니 이제 잊자는 ‘망각론’, (3) 그 당시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공범론’(共犯論), (4) 한때의 친일로 한 사람을 매도하지 말자는 ‘공과론’(功過論), (5) 민족 선각자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희생자론(순교자론)’, (6) 권력의 강제에 의해 친일을 했기 때문에 연약한 개인(범부)이 감당하기엔 무리였다는 ‘범부피해론’(호구지책론), (7) 친일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일이었다는 ‘직분충실론’, (8) 친일파를 거론하는 일은 죄 없는 후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연좌제 부활론’, (9) 약육강식의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소모하는 불필요한 담론이라는 ‘국론분열론’, (10) 정치인을 음해하기 위한 정치적 모략과 결합된 음해라는 ‘정치적 음해론’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