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늘 파국을 맞은 뒤에야 숙명처럼 뒷수습에 나서는 일이 유별나게 많다. 무슨 일이든 상처가 문드러지고 곪아터져야만 그제야 치유에 나선다. 멀리는 IMF 외환위기가 그랬고, 가까이는 저축은행 퇴출사건, 학교 폭력 문제, 한진중공업 사태, 쌍용자동차 사태, 각종 부정부패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그렇다.


 그럴 때면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명의인 편작(扁鵲)의 일화가 생각나곤 한다. 편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의사인 두 형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위나라 왕이 편작에게 물었다. “그대 형제들 가운데 누가 가장 실력이 뛰어난가?” 편작이 대답했다. “큰 형이 가장 뛰어나고, 그 다음은 둘째 형이며, 제가 가장 하수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편작이 삼형제 가운데 가장 떨어진다니 왕은 의아했다.
                                                       

                                          <미래저축은행과 김찬경 회장 자료 사진>

 

 그러자 편작이 자세히 아뢰었다. “큰 형은 환자가 아픔을 느끼기 전에 얼굴빛만 보고도 앞으로 병이 날 걸 압니다. 병이 나기도 전에 병의 원인을 제거해 줍니다. 환자는 큰 형이 병을 미리 막아 주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둘째 형은 환자의 병세가 가벼울 때 병을 알고 치료해 줍니다. 환자는 큰 병을 미리 낫게 해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형들과 달리 병이 커져 심한 고통을 느낄 때라야 비로소 알아봅니다. 위중한 병이어서 진기한 약을 먹이고, 아픈 곳을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병을 고쳐 주니 명의라고 믿으며 존경합니다. 가장 실력이 모자라는 제가 명의로 소문난 까닭입니다.”

 서민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한 저축은행 회장이란 인물들의 부정부패 행태를 보면 상상을 초월한다. 의사 노릇을 해야 할 감독 당국과 정권 핵심들이 중병을 알면서도 방치한 도덕적 해이를 용서하기 어렵다. 편작의 형들처럼 예후를 미리 알았지만, 단물 빨아먹기에 혈안이 돼 터질 때까지 모른 채 한 느낌이 확연하다. 지난해 한바탕 씻김굿을 한 부산저축은행 사고만 해도 중병이 드러난 후에도 2010년 G20서울정상회의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핑계로 치료를 늦춰 병을 키웠다. G20서울정상회의에서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규제하는 문제를 중점 논의하려하자 눈감고 아웅 한 정권 전체가 부산저축은행 계열의 불법사실을 더 오랫동안 묵인하는 중죄를 저질렀다.

 만신창이가 된 학교폭력도 마찬가지다. 오래전부터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였지만 여러 명의 어린 목숨을 잃고 나서야 실정에 맞지도 않는 종합대책을 내놓느라 허겁지겁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인들은 한술 더 뜬다. 대화와 타협으로는 풀지 못하고 늘 벼랑 끝까지 대치하다 파국에 이르러서야 피투성이가 된 채 어쩔 수 없이 봉합하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다.
                                                      

                                                       <편작 초상화>

 

 질병뿐만 아니라 자연재해와 인재(人災)도 사고의 징후는 미리 찾아온다. 하인리히 법칙이 이를 뒷받침한다. 1:29:300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하인리히 법칙은 심각한 안전사고가 한 건 일어나기 전에 29건의 가벼운 사고가 있고, 29건의 경미한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300건이나 되는 위험요소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미국 보험회사 관리감독자인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가 수 천 건의 고객보험 상담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도출한 공식이다. ‘산업재해예방’이라는 책에서 처음 언급한 이 이론은 예후들을 자세히 파악해 대비책을 철저하게 세우면 대형사고도 막을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작은 감기가 허파에 돌이킬 수 없는 병으로 진전되면 치료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사회적 사건의 비용은 더욱 엄청나다. 다르다면 사회에 병마가 오면 늘 애먼 서민들만 죽어난다는 점이 문제다. 저지르는 사람은 늘 잘 먹고 잘 사는 자리 높은 사람들이지만, 당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쌍한 기층민들이다.

 여기엔 우리의 의식도 한 몫을 한다. 병 고치는 편작만 알아줄 뿐 두 형처럼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기억조차 해주지 않는다. 홍수를 예방한 공로는 인정해주지 않는 반면 목숨을 바꿔가며 구조한 영웅만 상찬하는 게 세태다.

 

                                                                        이 칼럼은 내일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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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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