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에 귀성을 포기하고 집에서 보내는 이들에게 독서는 연휴를 보내는 가장 알찬 방법이다. 추석 연휴는 평소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책들을 비교적 여유롭게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때마침 책읽기에 좋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해 더욱 안성맞춤이다. 연휴 기간에 읽어볼 만한 책 몇 권을 골라봤다. 



■ 한국의 차 문화 천년 1, 2…정약용·김정희·초의선사 외/돌베개


차향(茶香)이 물씬 풍겨나는 사람이라면 필시 멋과 여유가 배어있으리라. 그윽하고 청아한 격조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유유자적 차중선(茶中仙)의 경지는 우리네 옛 선비 문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길이다. 낙락장송의 그림자가 드리운 초암(草庵)이나 선비의 문방에서 차를 달이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이야말로 지고의 경지다.
 

차는 넓은 것에는 마땅치 않아 혼자 마시면 탈속하고, 두 사람이면 한적하여 좋으며, 서너 명이면 즐기고, 대여섯 명이면 들뜨며, 일고여덟 명이면 베풀고, 그것을 넘으면 또한 잡스럽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시와 차가 어우러진 풍광, 시와 더불어 나누는 청징한 차 한 잔의 참맛이 담긴 <한국의 차 문화 천년>(돌베개)에는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에다 차향까지 서려 있으니 금상첨화다.

여섯 권짜리로 기획된 연작 가운데 이번에 먼저 나온 두 권은 조선 후기의 차 문화에 관한 시와 산문을 번역해 엮어 때로는 삽상하고, 때론 선미(禪味)와 현기(玄機)가 느껴진다. 차는 특히 술, 시와 더불어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문화 코드나 다름없다. 차에 관한 시를 읽는 맛은 마치 좋은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에 버금간다.


“깊은 샘에서 진리를 긷노라니 글맛(書味)이 통하여
정수리에 제호를 부은 듯 불심을 깨닫네
(중략) 천하의 차 끓이는 물을 논해보건대
강왕곡(康王谷) 물이 제일이라면 이 샘은 두세 번째는 되리.”


시·서·화 삼절로 이름 높은 신위의 ‘귀양살이의 한 기쁨’이라는 시다. 벼슬자리에서 쫓겨나 자연에 묻혀 사는 호해지사(湖海之士)의 심심파적이 가득하다.
 
조선 후기 서화가 이광사의 ‘내도재기(內道齋記)’에는 단아한 서재에 귀한 고서 서화, 문방구, 차를 옆에 두고 이따금 금석 자료나 희귀한 비탑을 품평하며 시간을 보내는 독서군자의 풍류가 고스란히 읽힌다. “졸렬한 시도 장기 두는 것보단 낫고 옅은 술은 차만 못하네”라고 읊조린 홍현주의 차시들도 각별한 운치를 더해준다. 마음에 맞는 벗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속세의 물욕과 세속의 번뇌를 씻으며 안빈낙도의 일상을 즐기는 시도 적지 않다.
 
스님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고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차의 인연만은 끊어버릴 수 없으니 어서 빨리 차를 보내 달라고 초의 선사에게 조르는 추사 김정희의 편지글에서는 돈독하고 특별한 교유의 멋과 함께 미소가 번진다.
 
이덕리의 산문 ‘기다(記茶)’의 한 구절은 무척이나 실용적인 모습을 띤다.

“차는 사람의 잠을 적게 만든다. 혹 밤새 눈을 붙이지 못하고 밤낮으로 관아에 있거나 아침저녁으로 심부름을 다니는 자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새벽닭이 울 무렵 베틀에 올라가는 여인이나 서재에서 학업에 열심인 선비에게 모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초의 선사가 중국차의 아류로 여기던 한국 차의 우수성을 설파하고 추사 김정희가 지리산 차의 탁월함을 역설하는 대목도 눈길을 잡는다. 예조판서를 지낸 신헌구는 ‘해다설(海茶說)’에서 초의 선사가 제조한 차가 스님들 사이에서만 이름이 났을 뿐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에 대해 못내 안타까워한다.

다산 정약용과 아들 학연, 초의 선사, 김정희와 아우 명희, 낙하생 이학규처럼 시와 산문이 모두 실린 이가 있는가 하면 차인(茶人)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도 많다. 앞으로 나올 나머지 네 권에는 삼국·고려 시대, 조선 전기와 중기, 조선 후기와 근대, 승려의 차 문화를 집대성해 소중한 자료가 될 게 틀림없다.

번역에는 한문 고전에 통달한 성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명망있는 인사 6명이 참여했다. 차를 얘기하려면 육우의 <다경>(茶經) 정도는 완독해야 마땅하나 이제 이 책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 독소 : 죽음을 부르는 만찬…윌리엄 레이몽/랜덤하우스


사하라 사막 이남의 ‘검은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보다 비만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3배나 많은 나라가 적지 않다면 믿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사실이다. 잠비아에서는 네 살 난 어린이의 20%가 비만이다. 아프리카도 비만이라는 질병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는 더 많다. 
 
비만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병’이라는 말을 처음 쓴 호주 디킨대의 폴 짐멧 교수는 단순한 외관상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병으로 여겨야 한다고 재촉한다.
비만은 세계보건기구(WHO)가 공식적인 전염병으로 선포하고 ‘은밀한 살인자’로 인정할 정도다. 미국에선 비만이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한다.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그 10분의 1에 불과하다. 연간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이 2만9000명인 반면 비만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은 40만 명에 달한다.
 


프랑스 출신 프리랜서 언론인 윌리엄 레이몽은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 ‘이 나라엔 왜 유난히 뚱보가 많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독소: 죽음을 부르는 만찬’(원제 Toxic)은 그렇게 탄생한, ‘질병을 키우는 모든 음식에 관한 충격 보고서’다. 레이몽은 아예 텍사스에 거주하면서 비만 문제를 추적하다 치명적인 대장균 O157:H7, 인간 광우병, 암, 심장병, 당뇨를 비롯한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식품 독소의 원인을 캐내기에 이른다.
 
흑사병, 스페인 독감, 에이즈에 이어 인류가 겪은 무시무시한 유행병에 비만을 추가해야할 것이라고 레이몽은 단호하게 경고한다. 그 진원지로 미국을 지목한 것이다. 미국 국민 3분의 2는 음식이 넘쳐나 걱정인데 비해 12%는 먹을 게 없어 고통을 겪는 역설의 현장을 레이몽은 선연하게 목격한다. 
‘코카콜라 게이트’의 저자이기도 한 레이몽은 사람들이 먹은 음식의 양이 아니라 질 때문에 비만해진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먹는 음식에 포함된 독성물질이 비만을 일으킨다.
 
미국에서는 매일 20만 명이 식중독에 걸린다. 대장균 O157:H7이 등장한 시기는 비만 유행병이 2단계로 접어든 시기와 맞물린다. 이 대장균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박테리아 목록에 올라 있다.
햄버거 빵 사이에 끼우는 다진 미국 쇠고기의 ‘생산이력관리’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여러 주에서 온 소 400마리의 살코기를 다져 햄버거 하나에 들어갈 패티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대장균에 감염된 소떼를 알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 축산업자들은 대장균 O157:H7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론을 조작하려 든다. 축산업자들은 막강한 ‘식품비방법’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 ‘식품비방법’에 걸리면 소송을 당하기 십상이다. 식품기업들은 재정이 취약한 공립학교나 대학에 기부하는 대신 학생들에게 판촉하는 수법을 가리지 않는다.
 
방사선을 쬐는 식품도 ‘비열처리살균’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피해 나간다. 방사선 소독식품은 독성 위험 외에 최대 80%의 영양소가 파괴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현재 허가된 방사능 조사량으로는 일부 박테리아나 광우병의 원인인 프리온을 완전히 박멸할 수 없다고 한다.
미국 가축의 80~90%, 공장형 축사에서 자라는 가축들은 100% 성장 호르몬을 투여받는다. 성장 호르몬을 사용하면 엄청난 이익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망률이 가장 높은 결장암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은 1989년부터 성장 호르몬을 투여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한 뒤 엄청나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버티고 있다.
미국 농무부는 미국에서 소비되는 쇠고기와 닭고기의 절반에서 최소한 항생제 잔류물이 두 가지 정도 검출되었다는 연구 보고서를 냈다. 사람이 식품을 통해 항생제를 흡수하면 항생제 내성이 길러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햄버거 맛을 돋워주는 지방질 샘플 12개에서는 정부에서 허가한 농약이, 100여개의 샘플에서는 인체에 유해해 사용이 금지된 농약 성분이 검출됐다. 농업의 산업화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은 농약을 쓰지 않으면 인류가 식량부족에 시달릴 것이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지구상의 기아가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불공평한 분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론데일 연구소는 실험실이 아닌, 실제 경작하는 밭에서 22년 동안 연구를 거친 끝에 친환경농법과 농약을 사용하는 농법 사이에 수확량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두 가지 혁명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제안한다. 먼저 우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소비자이기 이전에 시민으로서 매일 먹는 세끼 식사를 투표하듯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위험하지 않은 음식들로 밥상을 채울 만큼 구매력을 갖춘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비만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은 이들이 대부분 공장에서 생산한 음식 밖에 사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정치인들의 각성이다. 사회를 위험한 병증에서 보호하는 것도 자신들의 책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책은 현장 취재와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형태여서 긴장감을 더해 준다. 문장의 흐름은 짧고 경쾌하다. 그의 고발은 뇌수에 화살처럼 꽂힌다. 저자가 채식주의자도 동물보호단체 회원도 아니어서 더욱 거리낌 없다. 
 

■ 관용--헨드릭 빌렘 반 룬/서해문집


 
서열이 분명한 늑대 무리에서는 우두머리를 가리기 위해 해마다 수컷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러 수컷이 힘을 모아 우두머리에게 도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패자를 죽이지는 않는다. 승자가 송곳니로 패자의 목을 무는 시늉으로 싸움을 끝낸다.
거듭되는 싸움이 종족의 명맥을 끊을까봐 살육을 금지시킨 것이다. 식물과 동물은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지만, 이처럼 더불어 살기 위해 욕심을 잠재우고 관용을 베풀 줄 안다. 인간은 다른 생물을 멸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프랑스 식물학자 장 마리 펠트가 쓴 <정글의 법칙>(이끌리오)의 한 토막이다.
 
‘관용(톨레랑스)의 나라’다운 프랑스에서 전해오는 일화에는 이런 것도 있다.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한 청년에게 저격을 당했다. 청년이 쏜 총알 일곱 발 가운데 한 발을 맞은 클레망소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클레망소는 사형에 반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감옥에서 8년간 사격훈련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자신을 저격한 범인의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에 총알 일곱 발 중 한 발밖에 못 맞히는 청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프랑스의 명예는 실추되었소. 그 한 방도 부상만 입히는 정도라면 부끄러운 일이요. 그에게는 사격훈련을 더 시켜 목표물을 맞힐 수 있는 프랑스 청년으로 만들 필요가 있소.”
 

‘관용’에 관해서는 철학자 볼테르의 명언으로 흔히 인용되는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이 말은 볼테르가 실제로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사상을 정리한 이블린 홀이 출간한 <볼테르의 친구들>에서 볼테르가 한 말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다는 게 정설이다. 어쨌거나 볼테르는 <관용론>까지 써 프랑스 관용정신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관용은 상대방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경청하고 자기 생각이 다르거나 부족할 수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다. 관용과 용서는 사촌쯤 된다. 그렇지만 관용이 곧 용서는 아니다. 관용이 되면 물론 용서가 된다. 용서가 안 되면 관용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관용은 용서를 넘어선다.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헨드릭 빌렘 반 룬은 인류 역사를 ‘관용과 불관용의 역사’로 규정짓는다. 엄청난 지적 열정과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르네상스적 인물’인 반 룬은 <관용>(서해문집)이라는 걸작에서 ‘관용의 정신사’를 펼쳐 보인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관용의 역사’가 아니라 ‘불관용의 역사’라 해야 할 듯하다. 인류가 그나마 ‘관용’의 품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기나긴 역사 속에서 최근 몇 세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용을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투쟁, 종교적 신념이 낳은 무자비한 불관용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로마 집정관 심마쿠스, 율리아누스 황제, 에라스무스, 라블레, 볼테르, 디드로, 스피노자, 레싱 등 다른 역사책에서는 소홀히 다뤘던 많은 인물들이 ‘관용의 영웅’으로 승화한다.
 
우리는 요즘 들어 부쩍 힘의 억압이 만연하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최악에 가까운 ‘관용결핍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촛불 시민과 시위·집회엔 철퇴를 내리는 반면 국민의 혈세를 마구 낭비한 공직자나 공공기관엔 솜방망이로 관용을 베푸는 괴이쩍은 일들도 다반사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긴요한 덕목이 바로 참된 관용이다. 자기 신념에 대한 자신감과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관용의 정신을 올곧게 갈무리할 수 있다. 관용은 상대를 내편으로 만드는 비법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관용을 인간에 대한 가장 겸손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 한옥에 살어리랏다--새로운 한옥을 위한 건축인 모임/돌베개


 
어언 40년째 한옥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는 이론적으로 완전 무장한 한옥 전도사다. 서울 동소문동의 80년 넘은 전통 한옥에서만 35년째 산다.
그는 1968년 평화봉사단원으로 강릉의 조선시대 고택 선교장(船橋莊)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한옥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한국에 눌러앉은 것도 한옥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통 한옥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자연 속에 녹아 든 전통미와 사방이 열려 있는 동양적 여백미를 갖춘 예술품이다. 그의 한옥예찬은 비교건축론으로 기를 죽인다.
 
“중국 전통 건축물은 ‘나는 이렇게 부자고 힘이 세다’는 오만한 느낌을 준다. 일본 전통 건축물은 너무 깔끔해서 정이 가지 않는다. 이에 비해 한옥은 부드러운 곡선이 ‘어서 오세요’ 하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듯한 포근함이 감지된다. 그래서 한옥을 고려청자만큼, 유럽의 모나리자 그림만큼 중요한 보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한국의 혼’ 같은 한옥을 헐어버리고 아파트를 지은 뒤 ‘돈 벌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불이 난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애지중지하는 한옥을 떠나야 할 위기여서 한결 그렇다. 

 
 
한편에서는 이처럼 한옥을 푸대접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옥 열풍이 뜨거워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울 북촌이나 전주의 한옥마을 같은 곳을 찾는 이가 몰라보게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집값도 크게 올랐다는 풍문도 있다.
서울대에 ‘한옥 짓기’ 강좌가 이번 학기에 처음 개설된 것도 같은 흐름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이것도 한옥의 복권이라 해야 할까. 덩달아 한옥에 관한 책도 어느새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가 나올 정도가 됐다. 
 
한옥을 사랑하고 한옥 지킴이를 자처하는 ‘새로운 한옥을 위한 건축인 모임’이 펴낸 <한옥에 살어리랏다>(돌베개)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한옥의 멋스러움과 현대적 거주 공간으로서의 장점을 소담스레 얘기하듯 들려준다.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에서부터 제주도의 전통 초가에 이르기까지 27채의 한옥이 등장한다. 국내 유일의 한옥 동청사인 서울 혜화동사무소, 치과병원으로 정겹게 활용되는 한옥 등 300여 컷의 컬러 사진과 100여 컷의 도면까지 보태져 살갑게 ‘보며 읽을’ 수 있는 실용서이기도 하다.

(책 중에서)
 
한옥을 ‘여유가 있는 집’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집’ ‘비울수록 채워지고 나눌수록 커지는 집’이라고 한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정의가 그윽하다. 서울 강남에서 살다가 능소헌과 청송재로 이사와 십수 년째 살고 있는 풍경사진가 조향순씨의 글 가운데 한 대목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아이가 초등학생 시절 ‘우리 집’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도화지에 네모반듯한 아파트를 그렸다. 그것만으로는 구별하기 힘들겠다고 판단했는지 아이는 그림 옆에 ‘00아파트 00동 00호’라고 써놓았다.”

조씨에게 한옥은 자식들을 건전한 사고와 관용을 갖춘 자유인으로 키우기에 적당한 집이다. 한옥이 어떻게 변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해답을 준다.
 
우리네 주거공간 가운데 아파트 비중이 전체 주택의 60%에 육박하고, 남은 한옥 가운데 50%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옥’이란 낱말이 새우리말큰사전에 처음으로 등재된 게 1975년이라니 사라져감에 대한 안타까움의 산물이 아닌가.
 
<아파트 공화국>이란 책을 펴낸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얼마 전 잠깐 화제가 됐던 기억을 되살리면 뜨끔하다. 줄레조 왈. “서울은 아파트 때문에 하루살이 도시다.”
 
이렇게 일갈한 외국인도 봤다. “유럽 국가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복원하겠다고 나서는데 한국은 멀쩡한 과거 유산을 재개발 명목으로 없애고 있네.”
 

■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오주석/솔출판사


 
미술사학자 오주석을 한마디로 일컫자면 ‘옛 그림을 그윽하고 향기롭게 읽어주는 사람’쯤 되겠다. 그는 조선시대 그림을 맛깔나게 읽어주는 인물로 첫손가락에 꼽아도 손색이 없다. 그림을 감상할 때 단순히 ‘보기’보다 그림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는 선인들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전도하는 데 길지 않은 평생을 바친 공력이 지대하다. 
그는 우리네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다가 5년 전 하늘의 뜻을 채 알기도 전인 마흔 아홉에 속절없이 하늘나라로 가버려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의 저작은 그림의 문외한조차 즐겁고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강하다. 글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정제되어 군더더기 한 점 없어 보인다. 
 
대중적이면서도 그림만큼이나 은근한 맛과 훈향, 기품이 풍겨 나오는 문장이다. 마치 옛 그림처럼 담박하고 단아하다.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도록 언어의 섬섬옥수가 끌어당긴다. 그가 그림을 읽는 눈은 전문가들도 찬탄할 만큼 독창적이고 깊이가 남다르다. 그래서 그는 박물관에 박제돼 있던 우리 옛 그림을 다시 살려내 고미술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솔출판사)은 제목부터 그림은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또 다른 수작 <한국의 미 특강>도 예외가 아니다. 1998년 <단원 김홍도>로 시작된 그의 저작은 그렇게 옛 그림에 대한 뭇사람들의 사랑을 불러 모았다. 지난해 한·중·일·대만·홍콩의 석학들이 선정한 ‘동아시아 100권의 책’에 김구의 <백범일지>,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등과 더불어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 선정된 것만 봐도 무게를 짐작할 만하다. 
 
어떤 이는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 회화 예술계에 나온 <우리문화유산답사기>라고 상찬한다. 하지만 그런 유홍준에게 생전에 서슴없이 비판의 화살을 날렸던 고인이 달가워할지 모르겠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9명의 명화 12점에 관한 해설에서 내면의 삼엄함, 도가풍의 은일, 풍아(風雅)의 유유자적 같은 분위기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그의 눈, 아니 가슴에서 새로 읽히는 김명국의 ‘달마상’, 안견의 ‘몽유도원도’, 윤두서의 ‘자화상’,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김정희의 ‘세한도’, 정선의 ‘인왕제색도’ 같은 명작은 늠연한 선인들의 심상 그대로다.
 
책 서문의 한 구절이 사뭇 인상적이다.

“그림을 아는 사람은 그림을 설명하고,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그림을 즐기는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거기에 그려지는 대상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오주석은 우리 옛 그림을 잘 완상하려면 옛 사람의 눈으로,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는 자세를 갖는 것이 기본이라고 일러준다. 
그는 ‘옛 그림이 학문적으로 대할 때에는 까다로워 보일 수 있겠지만 한 인간의 혼이 담긴 살아 있는 존재로 대할 때 우리의 삶을 위로하고 기름지게 하며 궁극적으로 우리 생명의 의미를 고양시킨다’고 설파한다. 저자는 수묵화가 회화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양식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라고 품평하고 있다.
 
그의 얘기 가운데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게 있다.

“문인화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천 리의 먼 길을 다녀보고 만 권의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명심할 게 하나 더 있다. 그림은 천천히 오래 봐야지 바쁘게 서두르다 보면 참맛을 놓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 공감의 시대--제러미 리프킨/민음사---‘경쟁’의 시대 넘어 ‘공감’의 시대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과정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여론조사 과정에서 색다른 질문 하나가 추가됐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후보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전통적인 선택지를 놔두고 ‘공감(empathy)’이라고 대답했다.
놀라운 것은 ‘공감’을 대통령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한 여론에 별다른 반응을 보인 정치학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공감’이란 문제가 제기된 것은 지난 50년 동안 세계적으로 가치관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반영해 주는 현상인데도 말이다.
 
‘공감’을 자신의 정치철학 핵심으로 삼은 것은 바로 버락 오바마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도 대외 정책에서부터 대법관 선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공감’이란 말을 앞세운다. 그가 대통령 당선 연설에서 강조한 한마디는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다.

"나는 여러분의 의견을 듣겠습니다." 
 
2009년 4월 ‘뉴욕 타임스’는 미국 교실에서 일어나는 공감혁명을 1면 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는 공감을 주제로 하는 워크숍과 교과 과정이 실시되고 있는 18개 주의 실태를 전하면서 이런 선구적인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초기 평가가 매우 고무적이라고 소개했다.
공감 개발을 강조하는 새로운 교육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교육자들은 공감 능력을 개발할 때 학업성취도도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처럼 ‘공감’은 정치적 집회나 전문 단체,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토론 주제가 될 정도로 친숙한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래학자이자 사회사상가인 제러미 리프킨은 신작 <공감의 시대>(원제 The Empathic Civilization)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공감’ 개념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유러피언 드림> <소유의 종말>의 저자인 리프킨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문명이 끝나고 협력과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공감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다.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흑인 등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바뀌고, 타 민족, 타 인종에 대해서도 서로 인정하는 현상이 점차 뚜렷해지는 것은 공감의 문명으로 전환하는 방증이라고 그는 해석한다.
지은이는 이제 인간적 공감이 인류를 넘어 다른 생물에게까지 확장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애완동물을 동료로 여기는 것은 물론 다른 생물을 벗 삼고 자연에 대해 깊은 친화력을 갖게 되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미국 가정의 69%가 개나 고양이를 사람들이 자는 침대에서 재운다는 최근 조사결과만 봐도 그렇다.
 
세계경제체제도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더불어 분산 자본주의가 인도하는 3차 산업혁명이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석유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부의 집중과 적자생존을 초래한 경제 패러다임이 종언을 고하고, 오픈 소스와 협력이 주도하는 3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이미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는 대표적인 실례로 오픈소스 컴퓨터 운영체제인 리눅스와 무료 오픈소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들었다. 고대 신화시대의 구두문화, 농경사회의 문자문화에 이어 인쇄기술이 초래한 1차 산업혁명, 전기통신기술이 촉발한 2차 산업혁명, 21세기 분산 네트워크 혁명과 에너지 제도 혁신이 이끄는 분산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식변화와 경제·사회·정치에 3차 산업혁명이 몰고 오는 파급효과를 예언하고 있다.
 
공감 의식이 갑자기 확대되는 현상은 지구 곳곳을 황무지로 만들고 많은 인류를 더욱 가난에 빠뜨린 엔트로피 흐름의 증가를 등에 업고 나타난 결과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 엔트로피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는 열역학 법칙에 따라 사용가능한 에너지의 손실을 엔트로피라고 한다.
 
저자는 최근 생물학계의 연구를 바탕으로 문명의 명멸 원인을 공감의 물결과 엔트로피의 상호관계에서 찾는다. ‘공감 뉴런’이라는 별칭이 뒤따르는 ‘거울신경세포’ 이론이 그것이다. 
 
저자는 공감의 확장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접착제이며, 범위를 넓혀가는 공감의 연대감은 수많은 사람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어준다고 설명한다. 현재의 전 세계적 경제 위기도 20세기의 지정학적 권력투쟁에서 21세기에는 ‘생물권 정치’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분산에너지 경제체제가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식지가 생태계 안에서 기능하듯, 통치 제도도 다른 통치 제도나 전체 통치 제도로 통합되는 관계의 협력적 네트워크 안에서 생물권과 마찬가지로 상호의존적이고 호혜적으로 작동한다는 게 생물권 정치론이다.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공감 본능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모처럼의 분위기도 흐지부지되어 버릴 공산이 크고, 심지어 조롱이나 희화화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릴 위험도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그의 견해가 희망사항이 혼재돼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읽었던 <유러피언 드림>을 넘어서지만 속편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유러피언 드림>에서부터 ‘공감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시사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저작들 가운데 <바이오테크 시대>가 생명과학, <노동의 종말>이 첨단기술의 일자리 박탈 문제, <소유의 종말>이 접속권(Access) 개념, <수소 혁명>이 석유시대의 종말 등 단일 카테고리를 다룬 역작이었다면 <공감의 시대>는 인류사 전반을 섭렵하며 거시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동녘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는 1953년 4월16일, 지금이었더라면 온통 세상이 발칵 뒤집혔을 만한 발언을 한다.
“이 형법만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도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국회 연설에서다. 그렇다면 김병로는 ‘빨갱이’란 말인가.
 
그는 불과 다섯 달 전인 1952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 기념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발악적 만행을 방임하여 시일을 지연한다면, 시기의 장단(長短)은 있을망정 우리 인류는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의 두 발언은 모순일까. 김병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 반공주의자’다.
그는 ‘인권변호사’의 원조이기도 하다. 그는 1959년 4월3일 경향신문에 이런 수상단편을 썼다.

“내가 변호사 자격을 얻고자 했던 것은 일제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 함에 있었다… 변호사라는 직무가 자기의 생활직업으로만 하지 아니한다면 인권 옹호와 사회방위에 실로 위대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대한민국 사법부의 토대를 닦은 김병로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낱말은 단연 ‘청렴’과 ‘강직’이다. 그는 ‘법관이 청렴할 자신이 없으면 법원을 떠나라’고 죽비를 내리쳤다. 화장실에서 휴지 대신 신문지를 사용하고, 사법부 예산 가운데 쓰고 남은 돈은 한 푼도 빼놓지 않고 국고에 반납하는 등 그에게 얽힌 절약의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그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서 찾아보기 드문 사례다.
 
이 책은 우리 역사 속에서 김병로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 여섯 사람을 뽑아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이 어떠했는지를 생동감있게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운 민족주의자 장준하, 가문의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 망국을 보며 조선 선비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황현, 농민과 노비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꿈꾼 실학의 비조 유형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고 원칙에 충실해 ‘영웅적인 장군’으로 추앙받은 최영. 이들의 행적을 통해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에게 참 보수의 길이 어떤지를 제시하고 있다.
 
장준하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 감시자 역할을 자임하고 박정희 정권 시절엔 민족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 돌베개를 벤 민족주의자다. 그는 일제시대에 우익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해방 이후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진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회영은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린 명문 출신으로 여섯 형제와 더불어 가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또 다른 전형이다.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자결한 매천 황현은 개화에 부정적인 전통·보수주의자였지만 평생 지위와 재물을 탐하지 않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꼽힌다. 그가 ‘절명시’(絶命詩)와 함께 남긴 ‘유자제서’(遺子弟書)는 처연하다.

“(국록을 먹지 않은) 내가 가히 죽어 의를 지켜야할 까닭은 없으나,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키워온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아니한가?”
 
하나같이 병역의무를 다하지 않은 보수 진영의 수장 대통령·국무총리·집권당 대표, 온갖 불법·탈법·탈세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지금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이 책을 보고도 덤덤할까.
 

■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


 
일본의 인기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00년이 지나지 않은 책은 읽지 않는다고 했다던가. 예외 없이 실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구한 세월에 걸쳐 검증된 고전만 탐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리라.
 
그렇다면 2500년 넘게 숙성된 노자(老子)의 ‘도덕경’은 무라카미의 마음을 얻고도 넘친다. 하지만 ‘도덕경’이야말로 주석과 해설이 올바르지 않으면 읽어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게다가 ‘무위자연’에서 노니는 대범무쌍한 이야기여서 따분하리란 선입견이 지배하기 십상이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주석서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겠다. 중국에서만 1500권이 넘는 주석서가 쓰였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길을 따라 노자 곁으로 걸어갔을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는 수많은 ‘도덕경’ 주석서나 해설서 중에서 가장 쉽고도 재미있는 책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따지고 보면 이 책은 엄격한 의미의 주석서가 아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1928~94)이 직접 쓴 게 아니라 그를 스승이자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처럼’ 따랐던 이현주 목사와의 대담을 정리한 것이어서 소설마냥 편안하게 읽힌다.
유명한 한문학자였던 선친으로부터 배운 장일순처럼, 한학에 남다른 조예를 가진 이목사와 더불어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초교파적 담론으로 원문을 해석하고 풀어나가는 걸 따라가다 보면 법열마저 느낀다.
매 장마다 도교, 유교, 기독교, 불교, 심지어 동학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도가(道家)의 관(冠)을 쓰고 유가(儒家)의 신발을 신고 불가(佛家)의 옷을 걸치니, 세 집안이 모여 한 집안을 이루도다”라고 한 부대사(傅大士)의 문장에 ‘기독’과 ‘동학’을 넣었다고나 할까. 
 
‘…노자 이야기’는 일본이 자랑하는 대표적 석학 모로하시 데쓰지의 독특한 역저 ‘공자·노자·석가’를 연상케 한다. 저자의 탁월한 상상력을 동원해 세 성현의 가상 대담으로 엮은 ‘공자·노자·석가’는 모로하시의 나이 100세 때 펴낸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화제몰이를 했던 것 같다.
‘…노자 이야기’는 여기에 예수를 더해 현대의 거목들이 현실 담론으로 감흥 높게 펼쳐가는 쾌작(快作)이다. 덧붙이자면 책이 미처 완성되기 전에 장일순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후반부는 이목사가 이심전심으로 대화하며 마무리지었지만 읽는 이는 전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감쪽같다.
 
‘원주의 예수’로 불리는 장일순은 스스로 노자의 삶을 살았다. 중국에서 ‘노자’를 제대로 읽은 사람으로 손꼽히는 장자(莊子)와 장자방(張子房)은 각기 글과 삶으로 노자를 표현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장일순은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장자방처럼 노자의 가르침을 체현한 인물로 추억된다.
 
스스로를 ‘좁쌀 한알(일속자·一粟子)’이라 일컬을 만큼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삶을 영위해 일반인들에게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석 유영모와 씨알 함석헌에 버금가는 민족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는 장일순이다. 민주화운동의 기둥이었지만 훗날 박정희와 전두환조차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 넓은 가슴의 지성.
학창시절을 제외하곤 거의 치악산 자락의 원주를 떠나지 않은 채 세상의 중심에서 멀찍이 산 은둔자. 지학순 주교의 든든한 동지. 김지하 시인의 둘도 없는 스승. 당대의 지성 리영희 선생이 ‘살아있는 노자’ ‘벗으로 사귀게 된 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고 그리워한 분이 바로 장일순이다. 편벽되지 않은 해박과 언제나 낮은 곳으로 임하는 그의 삶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노자 이야기’는 장일순의 그런 삶이 녹아나 노자를 그저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올곧은 삶의 가치를 전도한다. ‘한살림운동’을 새로운 생명운동으로 제창한 그가 진정 깨달음을 실천한 자유인이었음이 은연중에 스며 나온다. 말년의 호를 제목으로 삼은 ‘좁쌀 한알’(도솔)이란 책을 함께 읽다보면 장일순의 삶을 온전히 가늠할 수 있는 일화들이 따사로운 봄볕처럼 다가온다.
 

■ 난세에 답하다: 사마천의 인간탐구--김영수/알마


 
마오쩌둥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패퇴시키고 베이징에 입성했을 때 그의 행낭에는 네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고난의 대장정 동안 침대 옆에 놔두고 틈날 때마다 지혜의 샘물을 마신 책들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중국어휘사전인 <사해(辭海)>, 어원사전인 <사원(辭源)>이 그것이다.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에게 카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것은 의외다. 그는 그 뒤에도 어딜 가든 <사기>와 <자치통감>을 거의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에게 역사책은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이었고 현재를 해석하는 거울이었다.
 
중국 근대 문학의 거장 루쉰(魯迅)은 <사기>를 “역사가의 절창이요, 운(韻)이 없는 이소(離騷)”라고 격찬했다. ‘이소’는 초나라 굴원이 쓴 중국 문학 요람기의 걸작시다. 중국 근대의 계몽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사마천을 “역사학계의 태조대왕이고 역사학의 조물주”라고 숭앙했다. 
 
<사기>를 읽지 않고서는 중국 역사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고 한 까닭을 알 만하다. 이처럼 <사기>는 중국을 읽는 첫 번째 코드다. 웬만한 언어로는 모두 번역되어 읽히는 세계인의 고전이자 동양적 지혜의 정수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국인 가운데 사마천과 <사기>에 관해 가장 깊이 천착하고 몰두하고 있는 이는 단연 역사학자 김영수가 아닌가 싶다. 20년 이상 <사기>를 연구해 온 그는 100여 차례 중국을 돌며 사마천의 흔적과 <사기>의 무대를 탐사했다.
최근 10여 년 동안에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사마천의 고향 마을을 찾아갔다. 문서로 된 자료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가 “당신이 찍은 사진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던 명언으로 답한다.
그의 정성과 애정이 얼마나 깊었던지 사마천의 고향인 산시(陝西)성 한청(韓城)시에서는 명예촌민이자 홍보대사로 위촉할 정도였다. 비중국인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외국인 최초로 사마천학회 정회원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렇게 태어난 책이 <난세에 답하다: 사마천의 인간탐구>(알마)이다. 이 책에는 <사기>를 감흥 깊고 쉽게 풀어 쓴 이야기와 발품을 비싸게 판 현장의 토향이 진하게 풍기는 르포르타주가 함께 버무려져 있다. ‘읽히게 쓴다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미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매컬로의 말이 떠오른다. 국내의 사마천 책들이 단순 번역서가 대부분인데다 그것도 <사기열전>에만 편중돼 있는 한계를 훌륭하게 극복해 준다.
 
‘<삼국지>를 한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는 속언도 있지만 지은이는 <삼국지>를 백번 읽기보다 <사기>를 한번 읽는 게 낫다고 단언한다. 그는 <사기> 읽는 보람을 열네 가지나 든다.
진한 감동은 물론 진퇴의 지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 능력과 재능은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로이 틔울 만한 풍자 등이다. 그는 <사기>의 86%가 인물에 관한 얘기여서 ‘최고의 인간학 교과서’라고 권면한다.
 
저자는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는 ‘지인논세’(知人論世)라는 한 마디로 <사기>를 요약한다. 인간 군상의 함축판인 <사기>를 읽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장 못난 정치가는 백성과 다투는 자다”란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화식열전’을 읽지 않고선 <사기>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바로 그 대목에서다. “한번 민심을 잃으면 홍수보다도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백성의 입을 막기란 물을 막기보다 힘들다”는 구절들도 각다분한 현실과 겹쳐 보인다.
 

■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김영사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하면 가장 불편하고 짜증스러워할 사람들은 종교계 지도자와 종교적 신념이 강한 신도들임에 틀림없다. 그것도 기독교와 가톨릭 교계 인사들일 게다. 독실한 신앙인일수록 그 강도는 정비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잖아도 도발적인 글쓰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무신론자로 손꼽혀온 영국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에 대한 종교인들의 반감은 이미 만성화한 상태다.
문제의 과학전사(科學戰士) 도킨스가 펴낸 최신작 ‘만들어진 신(원제 The God Delusion)’은 종교에 대한 선전포고문이나 다름없다. 특히 ‘지적 설계’라는 새로운 방어무기를 장만한 창조론에 깊은 신뢰감을 가졌다는 기독교와 가톨릭교계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장이다.
그만큼 논쟁적인 저작이 될 수밖에 없다. 종교를 비판하는 책의 출간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처럼 통렬하고 파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흔치 않다. 가위 과학과 종교의 대충돌로 봐도 좋겠다.
 
그는 모든 책에서 그렇듯이 여기서도 결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독자의 구미를 사로잡기 위한 수사학의 전주곡부터 강렬하다. 그는 들어가는 글에서 존 레논의 노랫말처럼 “상상해 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이라고 유혹한다. 그러면서 “무신론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현실적인 열망이고 용감한 행위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썼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스티븐 굴드와 더불어 찰스 다윈 이후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평가 받는 도킨스는 1976년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으로 ‘눈먼 시계공’ ‘확장된 표현형’ 등 일련의 진화론 베스트셀러 저서를 통해 종교계에 도전장을 낸 지 오래다.
그에게 ‘진화생물학의 마키아벨리’란 별명을 붙여줘도 좋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물론 웬만큼 책을 읽는 독자가 그를 모른다면 수준을 의심받아도 하소연할 길이 없을 정도다.
 
‘만들어진 신’이 지난해 9월 첫 출간된 뒤 10개월째 영미권에서 베스트셀러 상단을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그의 대중적인 과학전도가 여전히 먹혀들고 있음을 방증한다. 옥스퍼드 대학이 그에게 ‘과학의 대중적 이해’ 교수라는 특별한 경칭을 부여한 것 역시 이런 능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특장인 대중적인 인기와 학술논쟁을 교묘하게 접합하는 기술이 이 책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로 몇 가지 논리적이고 과학적 근거를 내세운다. 먼저 신의 우주창조설을 뒷받침하는 지적 설계론의 허점을 파고 든다. 가장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맨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어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적 설계자 가설은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한다.
 
신의 존재 여부는 현재진행형 가설이며 논증의 숙제로 남아 있다는 것을 두 번째 이유로 제시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 제시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못한 ‘이야기’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능(全能)과 전지(全知)가 상호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는 논리학자들의 견해를 그 근거로 들었다.
그는 신이 전지하다면 자신이 전능을 발휘해 역사의 경로에 개입하고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간증하지만 환각에 불과하다는 증거를 과학적으로 조목조목 들이댄다.
 
신이 없는 거의 확실한 이유로 그는 자연선택이론을 든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강력한 이론적 무기는 자연선택을 통한 다윈의 진화라는 견해다.
 
과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종교에 집착하는 주된 이유는 종교가 주는 위안 때문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의 교육체계에 따른 무의식적인 수용과 대안에 대한 인식 부재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진실과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습성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지구상에서 신이 사라진다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심리적 위안을 찾을 대안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인간 스스로 도덕과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변호한다. 그는 도리어 종교의 부작용으로 인해 불필요한 사회악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는다. 상당수의 전쟁이 종교에서 비롯되는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이스라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흥미로운 실험에서 대량학살을 비난하거나 용납하는 견해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 바로 종교였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이 책에 대한 기독교계와 학계의 반격도 만만찮다. 도킨스와 같은 옥스퍼드대의 앨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는 신적 권위에 대한 부정과 무신론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도킨스의 착각(The Dawkins Delusion)’이란 책에서 “도킨스는 학자적인 기본 절차를 무시하고 중상·비방으로 일관해 학자가 지켜야 할 금도를 저버렸다”고 반박한다. 교계와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도 도킨스가 지나치게 대중에 영합한다는 비난이 적지 않다.
이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저작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연결고리인 ‘과학적 사고로 세상을 보라’는 메시지가 이 책에서도 강조된다. 이한음 옮김. 2만5000원
 

■ 승자독식사회--로버트 프랭크·필립 쿡/웅진지식하우스


 
할리우드 스타 톰 행크스는 지난해 미국 영화사상 최고의 개런티를 기록했다. 행크스가 계약한 영화 ‘천사와 악마’의 출연료는 물경 455억원에 이른다. 한국에서도 장동건이 2004년 영화 한 편의 출연료로 8억5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는 달리 10만명이 훨씬 넘는 미국 영화배우들 가운데 12%만이 출연료를 받는다고 한다. 10여년 전의 통계지만 그 12% 중에서도 90%는 연간 5000달러 이하의 출연료를 손에 쥔다. 수십만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연예인 지망생들은 웨이터나 택시 운전사로 생계를 유지하다 결국 꿈을 포기하고 만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여자 체조 금메달을 딴 메리 루 레턴은 한동안 매일 아침 미국인들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금메달을 딴 뒤 수백만달러를 받고 광고모델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로 작은 점수차로 은메달을 딴 선수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한국 선수가 은메달을 목에 걸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한 적도 있다.
 
이처럼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현상은 이제 어느 나라, 어느 분야든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승자독식현상이 문화·예술·연예, 스포츠, 투자금융업, 학계, 법조계, 의료계 유명인사들의 노동시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긴 사람들이 독과점하는 부와 권력은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승자독식사회’는 어느덧 씁쓸한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이 함께 쓴 ‘승자독식사회(원제 The Winner-Take-All Society)’는 전세계적인 일등만능주의 현상의 심각성을 경고한다. 13년 전인 1995년 미국 사회의 승자독식시장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린 책이지만 우리 사회의 오늘을 보는 듯하다. 아니 지은이들이 묘사한 생생한 현장은 진도가 훨씬 많이 나가고 있다. 

 
‘승자독식사회’란 용어도 지은이들이 사실상 처음 만들어냈다. 물론 팝그룹 아바가 80년대에 이미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네(The Winner Takes It All)’란 노래를 불렀고, 카지노에서도 승자독식의 법칙이 적용돼 오긴 했다.
 
승자독식시장을 탄생시킨 핵심 요인으로 저자들은 원거리 통신과 정보기술의 발달을 꼽는다. 컴퓨터가 결정타를 날린다. 네트워크 경제에서 경로의존성은 일등에 대한 쏠림현상으로 나타나 승자독식주의를 구조화하고 고착시킨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짧은 기간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것도 정보화 사회에서 승자독식의 원리가 작동한 결과다. 영어의 국제어 시장 독점도 마찬가지다. 
 
‘이코노믹 씽킹’이란 베스트셀러로 우리에게 낯익은 프랭크와 쿡은 흔히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레이건-부시 행정부와 대처-메이저 행정부 때문도 아니며, 노조의 쇠퇴 탓도 아니라고 진단 결과를 내놓는다. 문화적인 요소와 무역의 확대는 부차적인 이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사회가 가장 곤욕스러운 모순인 형평성과 효율성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긴 하다. 승자독식사회가 멈출 수 없는 까닭은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낳는 악순환 때문이다. 저자들은 ‘성공이 성공을 부른다’는 표현도 착안점으로 삼았다. 
 
지은이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승자독식시장의 폐해와 부작용이다.

“승자독식시장에서 벌어지는 최고를 향한 경쟁은 실제로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을 매료시키지만, 동시에 두 가지 형태의 낭비를 조장한다. 첫째는 너무 많은 경쟁자들을 끌어들이고, 둘째는 경쟁과정에서 비생산적인 소비와 투자를 초래한다.” 
 
저자들은 최고상을 향한 수많은 경쟁이 엄청난 비용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이고 불평등의 증가가 경제성장을 자극하기보다는 축소할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이른다. 합의를 통해 최고상의 크기를 줄이고 경쟁을 완화해야만 비참한 사회로 추락하지 않게 된다고 충고한다. 승자독식사회는 승자에게도 독약일 뿐이라고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부의 편중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일류 대학병, 출판시장의 눈물겨운 베스트셀러 만들기, 유명인사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에 대한 관심도 승자독식의 문화시장이 낳은 폐해다. 지은이들은 독식을 향한 승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군비경쟁’에 빗댄다. 
 
이 책은 승자독식시장의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도 제시한다. 누진세 확대, 소송남발 규제, 의료비 개혁, 교육 혜택 증대, 선수연봉 상한제, 사회안전망, 문화상품에 대한 정부 지원, 조금 덜 일하는 사회 같은 것들이다. 불평등을 줄이려면 평등이 가장 요구되는 영역부터 정부가 지원하라고 우선 순위를 주문한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경쟁을 막는 것은 하수이고, 위험을 동반하며, 해결책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해답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아 보인다. 저자들이 ‘군축협정’으로 일컫는 각종 대책들이 실제론 큰 도움을 주지 못했던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금 덜 일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제안 같은 것은 지금 한국 사회라면 돌팔매의 표적이 될 분위기다.
 
그렇지만 우리가 ‘승자독식’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10여년 전에 이미 통찰한 것만으로도 혜안이 느껴진다. ‘88만원세대’처럼 승자독식시대를 개탄하고 처방하는 신간이 속속 등단하지만 이 책이 원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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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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