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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한국은 어떤 민주주의입니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민주주의를 대놓고 빈정거리면서 비판한 것으로 이름 높다. ‘인간의 타락한 형식’이라거나 ‘동등한 권리와 요구를 주장하는 난장이짐승’ ‘겉으로만 보면 평화적이고 일을 열심히 하는 민주주의자들과 혁명주의자들’ 따위로 매도할 정도다.
특히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권력에의 의지>에서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의 평등의식을 비판하며 노골적으로 민주주의를 때린다.

그런 니체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들도 민주주의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면 뭐라고 할까.

영국 옥스퍼드대 동물학자인 도라 비로 박사팀은 한 무리의 비둘기들에 위성항법장치(GPS)를 부착하고 15㎞ 정도 날아가는 모습을 관찰한 결과 완벽하지는 않지만 순간순간 반드시 민주적 위계질서에 따른 집단의사결정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최근 논문에서 밝혔다.

수많은 비둘기 떼가 비행 방향을 바꿀 때마다 순간적인 의견수렴 ‘투표행위’가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리더와 여론 주도층이 어린 새끼의 투표권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새들이 진화 과정에서 이 같은 행동 결정 양식을 선택하고 발전시켰다면 다른 동물집단은 물론 인간도 이 같은 메커니즘을 일반화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연구진은 유추한다. 민주주의가 공동체 내에서 공적인 결정을 만드는 틀이라고 본다면 이 같은 현상은 놀랄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모레 4·19혁명 50주년을 맞고, 절차적 민주화를 이룬 뒤 20년이 지났지만 민주주의가 질적으론 도리어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1980년대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희망의 언어였다면, 90년대에는 실험의 언어였으며 2000년대에는 절망의 언어가 되었다’는 풍자가 귓전을 울린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조사해 발표하는 2008년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아직 167개 국가 중 28위권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층에서는 잊을만하면 ‘민주주의의 과잉’을 운위하곤 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제자 박상훈·박찬표가 함께 쓴 <어떤 민주주의인가>(후마니타스)는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따져 묻는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름만 갖고 있지 않다. 직접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보호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 법치민주주의, 숙의(심의)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풀뿌리민주주의, 직접행동민주주의, 전자민주주의….

지은이들은 민주화 이후에는 민주주의냐 아니냐를 추상적으로 따지는 것보다 ‘실제로 어떤 민주주의냐’하는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 뼈아프게 지적하는 것은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할 때 민주주의는 정치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영역,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노동의 정치참여 확대와 보편적 시민권의 향유와 같은 요소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는 대목이다.

저자들의 중요한 인식 가운데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이렇다.

“우리가 가진 공통의 현실인식은 정당과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로의 발전 경로는 점차 봉쇄되고 있는 반면 ‘국가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가 돌이키기 어려운 정도로 심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권 확대의 요구는 강화되고 있지만, 한국의 자유주의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의 기원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대면해야 할 민주주의의 허약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베이징의 봄’으로 불리는 89년 6월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시위대는 ‘안녕하세요, 민주주의님’(爾好 德先生 Hello Mr. Democracy)이라는 플래카드를 높이 들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인사말이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요’라는 물음 앞에 놓여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민주주의의 모든 질병은 더 많은 민주주의에 의해서 치료될 수 있다’는 앨프레드 스미스의 처방이 대답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절차와 제도에 갇힌 민주주의는 죽은 민주주의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