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재에서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유가의 공자·맹자와 도가의 장자는 책에 관한 생각도 차이를 드러내는 듯하다. 불가의 학승(學僧)과 선승(禪僧)의 차이와 흡사하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溫故知新)는 공자의 말은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를 한마디로 간추려 놓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면 옛 사람들과도 벗이 될 수 있다’(讀書尙友)는 맹자의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반면에 장자는 책에만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 은근히 경계한다. 중국 고전 <장자>에 나오는 임금과 수레바퀴 장인의 우화가 대표적인 예다.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는 제나라 환공에게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만들던 늙은 장인이 “무슨 책이냐”고 묻는다. 환공이 “옛 성인의 말씀”이라고 하자, 장인은 “이미 죽은 성인들의 말씀이라면 그건 말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 것(然則君之所讀者, 故人之糟魄已夫)”이라고 되받는다.
환공이 화를 내자 늙은 장인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설명한다.
‘바퀴 구멍에 바퀴살을 맞춤하게 끼우는 섬세한 작업은 짐작으로 터득해서 마음으로 느낄 뿐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자식에게도 전수하지 못하니 늘그막에도 이렇게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처지다. 그러니 옛 성인이 터득한 지혜도 말로 전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영국 소설가이자 케임브리지대 교수였던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는 고전과 신간의 일정한 균형 유지를 권면한다.

“평범한 독자들이 신간과 고전 중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한다면 고전을 읽으라고 조언할 것이다. 신간 한 권을 읽고 난 뒤 고전 한 권을 읽기 전까지는 결코 또 다른 신간을 읽지 않도록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만일 이것이 너무 많다고 느껴진다면 적어도 신간 세 권당 고전 한 권을 읽어야만 한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쓴 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리튼은 “과학에서는 최신의 연구서를 읽어라. 문학에서는 가장 오래된 책을 읽어라”고 권한다. 정답은 물론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진부한 주문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동서와 고금이 그리 다르지 않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서문에서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의 저자 데이비드 덴비도 고전을 읽어야 하는 으뜸가는 이유로 ‘우리와 멀리 떨어진 시대, 우리와 사뭇 다른 문화와 사유의 소산’이란 점을 든다.

특히 이탈리아의 저명한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민음사)에서 고전에 대한 정의를 14가지로 내린다.
그 첫번째가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란 구절이다.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라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이어지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고전이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칼비노는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이자 모럴리스트 작가인 에밀 시오랑의 입을 빌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를 흥미롭게 제시한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피리로 음악 한 소절을 연습하고 있었다. ‘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오?’ 누군가 이렇게 묻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소.’ ”

고전을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이야기의 근본이 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 도서관 대출 도서 분석결과 ‘서울대생들은 신간을 주로 읽고 하버드대생들은 고전을 많이 읽는다’는 기사가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상징성을 띤 이 기사가 영국 저술가 새뮤얼 스마일즈가 했던 말과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사람의 품격을 그가 읽는 책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마치 그가 교제하는 친구로 판단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