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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타성에 젖어버린‘인권 감수성’ 깨우다

 입력 : 2010-07-16 17:16:29수정 : 2010-07-16 17:16:30
 
불편해도 괜찮아…김두식 | 창비

첩보 액션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이병헌은 사랑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김태희에게 기습키스를 감행한다. 그러자 김태희는 따귀를 갈겨버린다. 하지만 곧바로 사랑에 빠진다. 일일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한술 더 뜬다. 희주라는 철없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따귀를 능청스레 때린다. 시청자들이 들고 일어났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지난날엔 뺨을 때리는 게 주로 남자였지만 요즘은 정반대가 더 많다. 어떤 이들은 드라마 작가가 대부분 여성이어서 그럴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기도 한다.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드라마 속의 연인들이 사랑과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따귀를 많이 때리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거라고 개탄한다. 행여 작가들이 ‘여자가 따귀를 때리는 장면도 함께 집어넣었으니 남녀평등문제는 해결됐어’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드러낸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기회를 준다면, 먼저 최근 10년간 한국 드라마에서 따귀 때리는 장면만 모두 모아서 보여준 뒤 그 문제점을 지적해보고 싶습니다. 따귀소리만으로 가득 찬 화면을 10분쯤 보고나면 방송국 사람들도 마음을 고쳐먹게 되겠지요.”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에게 감독상, 문소리에게 신인배우상을 안긴 <오아시스>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꼬집는 사회성 짙은 영화로 호평 받았다. 그렇지만 지은이는 거장이 만든 탁월한 영화에서 ‘옥에 티’를 잡아낸다. 기술적인 티가 아니라 관점과 철학의 문제다. 강간 미수를 통해 처음 맺어진 종두(설경구)와 공주(문소리)의 관계가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비판이 그 첫 번째다. 사회의 편견 때문에 두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시각 자체야말로 편견이라는 것이다. ‘옥에 티’는 실수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 익숙하게 젖어온 일상의 관성이다.

1980년대에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폐광 결정에 맞서 장기 파업을 벌이는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 가난한 광부의 아들인 11살 소년이 세계적인 발레리노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역경을 딛고 성공을 이룩하는 상투적인 도식을 따르고 있지만 광부들의 단결과 분열, 공권력의 집요하고도 무자비한 노조 탄압을 다룬 정치영화이기도 하다. 일러스트레이션 | 정원교

장애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시혜가 아닌 인권’이라는 점을 근육디스트로피 장애인 에번 켐프의 목소리로 대변해 준다. 근육디스트로피 환자들을 위한 ‘텔레톤’으로 무려 10억달러에 가까운 돈을 모금한 것은 누가 봐도 좋은 일이다. ‘텔레톤’이란 텔레비전과 마라톤의 합성어로 텔레비전을 통한 장시간 모금방송을 뜻한다. 이를테면 KBS의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이다. 이에 관해 켐프는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냄으로써 편견을 확산시켰다고 주장한다.

‘영화광’으로 알려진 저자는 이렇듯 인권문제를 80여편의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고리로 삼아 감흥 깊게 풀어나간다. 노동자, 병역거부, 검열, 집단학살 등 국가·정치권력, 자본에 의한 탄압 같은 거대담론뿐만 아니라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인종차별 등 개인의 인권문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저자는 인권을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러면서 일상에서의 ‘인권 감수성’ 기르기를 강조한다.

한국영화 <로드 무비>,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동성애 작품을 예로 들며 이성애자들이 느낀 불편함에 관해서도 생각의 문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지만 다른 형태의 사랑이 존재함을 최소한 이해해야 한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명언이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 할 권리를 위해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권익처럼 양쪽 이야기를 듣고 헷갈리는 상황에서는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란 원칙을 적용할 것을 권면한다. 형사소송법에서 자주 논의되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를 변용한 표현이다. 영국의 대처 총리 당시 탄광노동자 파업 이야기를 다룬 영화 <빌리 엘리어트>와 홈에버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외박> 등이 소재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와 병영문화 개선문제는 <방문자> <반두비>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영화로 접근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장교와 사병이 친구처럼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면서도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장점을 배우라고 권하는 부분이다.

하퍼 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앵무새 죽이기>는 흑인인권보호의 전기를 마련한 명작의 하나다. 핵심 주제인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는 인권 이해의 중요 명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흑인은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맹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불쌍한 흑인을 돕는 의로운 백인 변호사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종차별의 위험수위에 놓여있다고 주장하는 저자가 역설하는 것도 바로 ‘역지사지’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보듯 저자는 자녀와 청소년들의 인권문제에서 ‘학생도 어른과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사실부터 인정한 뒤 전체 그림을 새롭게 그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여기에 동원된 것이 다소 속된 표현이지만 ‘지랄 총량의 법칙’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만큼 사춘기 자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지랄’을 쓰는 것이겠거니 하고 여유롭게 이해하라고 당부한다.

영화 검열을 결사반대하는 저자는 책에서 ‘막말 대사’ 인용도 불사할 정도로 거침없다. 그런 만큼 엄숙한 주제에도 흥미롭게 읽힌다. 1만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