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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차가운 경제학자의 세계화 성찰

입력 : 2008-02-01 17:02:21수정 : 2008-02-01 17:02:25

지난주 막을 내린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을 지켜보면서 조지프 스티글리츠를 먼저 떠올린 건 순전히 그의 대표저서인 ‘세계화와 그 불만’(세종연구원) 때문이다. 세계화 전도사들의 모임에서 그의 성찰적 인식변화의 조짐이 조금이나마 엿보인 데는 ‘세계화와 그 불만’이 일말이라도 기여하지 않았을까 싶었던 게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세계화 관련 저작 중에서 하필이면 이 책일까. 한스 피터 마르틴의 ‘세계화의 덫’, 조지 몬비오의 ‘도둑맞은 세계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허울뿐인 세계화’, 피터 고완의 ‘세계 없는 세계화’, 로버트 아이작의 ‘세계화의 두 얼굴’, 다니엘 싱어의 ‘누구를 위한 세계화인가’처럼 같은 반열에 놓아도 좋을 법한 명저들이 숱한 데도 말이다.

다른 저자들과 달리 그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단 월계관을 쓰고 있기 때문임은 물론 아니다. 차가운 경제학자이면서도 그나마 ‘인간의 얼굴을 지닌 따뜻한 세계화’를 꿈꾸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론이나 음모론적 해석없이 그 자신이 ‘갑’의 입장이었던 세계은행 부총재 겸 수석 이코노미스트로서 겪은 체험담이어서 좀더 미덥다.

스티글리츠가 ‘세계화와 그 불만’에서 화살을 겨눈 것은 세계화의 첨병을 자처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기구다. 그가 대립각을 세운 국제경제기구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이들의 운용 주체인 미국과 맞닿는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가 이번 다보스포럼에서 지구촌 빈민과 가난한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어쩐지 익숙하지 않다.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이 “2008년은 보호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유무역의 이념을 수정해야 하는 중요한 해”라고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화 현상에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드러난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 같은 세계화 전도사가 어깨를 으쓱하지만, 죽을 때까지 반(反)세계화의 목소리를 드높인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정반대편에서 겨눴다. 그런가 하면 앤서니 기든스 같은 학자는 대세를 인정하고 부작용을 고쳐 나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비판적 지지자의 줄에 서 있다. 스티글리츠는 한결 냉엄한 비판자인 셈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뒤따르는 법칙은 문명과 역사에서 어렵잖게 발견된다. 산업혁명 이후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의 반 혁명적 기계파괴운동인 러다이트운동의 물결이 거셌다. 정보혁명 이후에도 흡사한 흐름이 재현됐다. 네오러다이트운동이 그것이다. 첨단문명 파괴주의자 유나바머로 상징되는 적극적 네오러다이티스트가 있는가 하면, 첨단 문명을 단순 거부하거나 은둔하는 소극적 네오러다이트족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컴퓨터가 보편화된 지금도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소설가 김훈씨와 같은 애교스러운 고집불통이 본보기다. 논쟁적인 지식 사회에서는 사회학자이자 기술철학자인 자크 엘륄처럼 첨단기술문명에 적극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있는가 하면,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같이 부정적인 측면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방법론을 모색하자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세계화와 그 불만’은 이따금 과장되게 소개되거나 인식되곤 한다. 일부 세계화 비판자들에게는 일종의 성전(聖典)처럼 여겨진다. 반세계화의 선봉에 서 있는 책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반세계화주의자가 아니다. 현재진행형인 세계화가 지닌 문제점과 부작용을 환기시키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출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과신하는 이명박정부가 걱정스러운 점도 이 책을 되돌아 보게 한다. 뱀 다리 하나.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반세계화 운동도 사실상 세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