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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저급해진 한국의 보수


 ‘보수세력은 있어도 보수주의는 없다.’ 한국 보수진영이 광복 이후 80년 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아킬레스건 같은 말이다. 한국 보수진영은 철학이 빈곤한 반면에 목소리는 크다. 사회 주류를 자처하는 보수 엘리트 계층은 사상적 무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그저 국가 발전주의와 반공이면 충분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소추 국면에서 한국 보수는 한결 천박하고 저급해졌다. 품격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보수의 우두머리인 윤 대통령은 위신 따위는 깡그리 내팽개치고 온갖 비열함과 치졸함만 노정하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궤변·요설·기행의 목회자와 아스팔트 극우세력에 휘둘려 ‘아무말대잔치’에 합류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민주적 문화강국으로 각광받던 대한민국이 군사문화 유산을 온전히 청산치 못한 나라로 평가절하받게 됐다. 위헌·불법 계엄의 국가적 피해는 실로 막대하다. 그런데도 탄핵 심판에 출석한 윤석열은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천연덕스럽게 눙쳤다.


 한국 보수는 여전히 냉전 시대에 사는 듯하다. 오랜 권위주의 통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변화가 느리기 그지없다. 사상 처음 탄핵당하고 형사처벌까지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라는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한강의 기적과 경제성장 같은 독재정권 시대의 용어가 대신했다. 윤석열은 탄핵소추 이전에도 공산 전체주의, 반국가세력 같은 극우 단어로 계엄과 내란의 전조를 보였다.

                                                                                               

                                                                                                 

 서울 광화문, 부산, 대구 등지에서 연일 이어지는 보수진영의 탄핵반대 집회에는 어이없게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자’는 구호와 깃발이 난무한다. 윤석열이 탄핵소추되고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원인이 불법 비상계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했기 때문 아니던가?


 극우 보수진영의 행동대장인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는 “우리가 윤 대통령을 구치소에서 데리고 나올 수도 있다”고 선동했다. 그는 “서울서부지법으로 모여 대통령 구속영장을 저지하기 위해 국민저항권을 발동해야 한다. 헌법 위에 국민저항권이 있다 ”고 지지자들을 부추겼다. 

 

  이 궤변론자는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불법적 국가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어이없게도 권력자 윤석열의 구속을 막는 데 끌어다 썼다. 이승만을 국부라고 추앙하는 그는 자신들의 행동이 4·19혁명이며, 국민저항권을 발동한 것이라고 우긴다. 4·19혁명이야말로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추방한 것인데 ‘아무말대잔치’를 벌인 게 아닌가.


 역사신학 교수이자 목사인 분이 명쾌하게 간파했듯이 전광훈은 ‘한국 보수의 사채업자’ 같은 존재다. 정치적 부도가 난 보수진영이 마지막으로 고개 숙이고 들어가 손 벌리는 곳이 전광훈이라는 뜻이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전광훈 집회에 찾아가 ‘90도 폴더 인사’를 하며 아부한 것과 같은 행태가 대표적이다.

                                                                                           


 이젠 다수의 여당 의원이 극우세력의 위협에 못 이겨 탄핵반대 집회에 참석해 부화뇌동하는 일이 잦아졌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오래 전 전광훈과 함께 한 집회에서 막말을 쏟아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김 장관은 국민의힘 차기 대선후보 1위로 거론된다.


 보수진영은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법질서를 한꺼번에 허물어 버렸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법원을 침탈하는 무리를 응원하고, 윤석열 탄핵소추를 심판하는 헌법재판소를 무력화하려 한다. 윤석열 내란을 정당화하는 안건을 대표 발의해 물의를 빚은 김용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차관급)은 “대통령을 탄핵한다면 헌법재판소를 두들겨 부숴 없애야 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김 위원과 흡사한 주장을 펼치는 다른 극우 인사들도 숱하다.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 같은 국민의힘 지도부 인사들도 헌재 흔들기에 앞장섰다.


 국정을 책임진 보수 여당이 국가의 바탕을 이루는 헌법기관을 공격하는 기이한 현상이다. 현 상황을 ‘제2의 6·25’로,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가 된 윤석열을 순교자에 비유하는, 해괴한 국민의힘 지도부 인사도 나타났다. 더 우려스러운 일은 보수 언론이 극우 진영을 부추기는 듯한 행태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탄핵을 인용해 파면하면, 실제로 ‘내전’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는 험악한 분위기다. 바른말 하는 보수논객들은 극우세력의 적으로 변했다. 눈앞의 지지율에 눈이 멀어 상식과 원칙을 저버리는 여당은 어리석은 오기로 자해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윤석열 지지세력이 현 상황을 임시변통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보수를 재건할 수 없다. 대한민국을 망치는 ‘극우 카르텔’과 결별하고 헌법정신과 민주주의가 체화된 건강한 보수 집단이 혁신을 이끌어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