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인이 자기 나라 국무부장관에게 던진 질문 하나가 한국인들에겐 참담하게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한 것은 실수였을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 마이클 번바움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에게 이렇게 물었다.
기자 질문은 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가리킨다. 군사독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비상계엄령을 발동한 윤 대통령이 (지난 일이지만) 110여 국가가 참석하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할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블링컨 장관이 “한국은 민주주의와 민주적 회복력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례 중 하나”라며 “한국이 그 모범을 보여주기를 계속 기대할 것”이라고 안도하긴 했다.
미국이 아닌 나라가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단독 개최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었다. 수백년 민주주의 역사를 지닌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니었다. 그 바탕에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바이든행정부는 한국을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칭송하고 민주주의 챔피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우쭐한 대통령 윤석열은 정상회의에서 “한국이 (세계) 민주주의 증진에 앞장서겠다”고 호언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사이먼 존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한국의 선진국 도약 이유를 민주주의의 안착에서 찾았다. 한국이 지금의 민주주의를 위해 수십년 동안 투쟁해왔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군사정권이 여전히 집권 중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을 일이라고 했다. 이처럼 어느덧 해외에서는 한국이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올해 초 발표된 ‘민주주의 지수’도 167개국 가운데 22위를 차지했다. 27위인 미국보다 높았다.
윤석열의 멍청한 허튼짓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순식간에 변했다. ‘세계에서 가장 짧고 기괴한 계엄령’이라는 오명과 함께 민주주의 모범국가 한국의 위상은 불과 몇시간 만에 추락하고 말았다. 로버트 랩슨 전 주한미국대사대리는 (계엄령이) 민주주의 등불로서의 한국의 명성과 위상을 훼손했고 21세기 현대 한국의 찬란한 모든 측면에 후폭풍을 가져왔다고 안타까워한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한결같이 비상계엄 선포가 2차세계대전 이후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모범 사례인 한국의 위상을 무너뜨린 행태라고 꼬집었다. 일본의 극우 언론 산케이신문조차 “이번 계엄령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발령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조롱했다. 아사히신문은 “민주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사태가 한국에서 일어났다”고 손가락질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뻔뻔스러운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건 충격적이고 수치스럽다”고 했다. “세계 민주주의의 핵심국가이고 K-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성을 드러내고 있는 나라에서 윤석열은 대통령은 물론 어떤 직책에도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고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갖고 이 자리에 섰다”고 외쳤다. ‘자유’라는 단어를 무려 35차례 언급했다. 윤석열은 2년간 공식 메시지에서 자유를 1000번 이상 말했다는 통계도 있다.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민주진영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해 온 윤석열의 ‘가치외교’도 뿌리뽑히게 됐다. 미국의 한국 전문가는 계엄령이 가치외교를 강조해 온 한국의 대외정책이 위선적이고 우습게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석열은 머릿속부터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비상계엄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윤석열이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보수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던 게 참으로 기이하다. 그래 놓고 광주의 핏빛을 선연하게 했던 무장 공수부대원을 민의의 전당인 국회로 진격시켰다.
다행스럽게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은 위대했다. 무너지기 직전의 민주주의를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막아냈다. 이제 나라를 파괴한 내란의 우두머리를 법에 따라 신속하게 단죄하고, 통치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정상적인 민주주의 회복의 길이 열린다. 윤석열은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지 여전히 모르는 것 같다.
국회가 윤석열 탄핵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 탄핵소추만이 대통령의 직무를 실질적으로 정지시킬 유일한 방안이다. 대통령 한사람 탄핵하려다가 대한민국 체제를 탄핵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은 권력욕에서 나온 궤변이다. 우리에게는 대통령 탄핵과 질서 있는 절차로 민주주의를 살려낸 소중한 경험이 있다. 황당한 계엄령 사태를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전기(轉機)로 삼아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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