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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日 우경화의 뿌리 캐기

입력 : 2008-07-25 17:45:25수정 : 2008-07-25 17:45:35


이토 슌야 감독의 일본 영화 ‘프라이드:운명의 순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내각 총리였던 1급 전범 도조 히데키가 미국과 싸운 영웅담으로 장엄하게 그려졌다. 이 영화는 일본 우익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자유주의 사관’의 영화판본이다. 10년 전 이 영화가 출시되자 한국·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비판 여론이 거셌으나 일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상영됐다. 감독 이토는 그때 이렇게 외쳤다. “일본인들이여, 제발 이제 타이타닉 그만 좀 보고 이 영화를 봐 달라. 이 영화를 봐야만 올바른 일본인이 될 수 있다.”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원작, 각본, 총제작까지 맡은 영화 ‘나는 당신을 위해 죽으러 간다’도 그런 점에선 별반 차이가 없다. 이시하라는 뻔뻔스럽게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전쟁을 미화할 생각도 없다. 다만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당시의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며 우익 특유의 왜곡된 감성에 호소한다. ‘전국자위대 1549’ ‘망국의 이지스’ ‘로렐라이’ ‘남자들의 야마토’도 일본 우익 사상을 교묘하게 끼워 넣은 극우 영화의 대표선수에 속한다.

일본 우익세력이 지니고 있는 위험한 ‘천황주의’나 ‘국가주의’는 이처럼 치밀하고 집요하다. 그들이 꿈꾸는 일본의 미래는 헌법 개정,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역사교과서 개정작업 등을 통한 ‘보통국가의 완성’이다.

김호섭 중앙대 교수 등 4명의 일본 전문가가 함께 펴낸 ‘일본우익연구’(중심)는 뿌리 깊은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와 이념·행동 양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도우미로 적격일 듯하다. 지난 2000년 초 출간된 국내 최초의 체계적인 일본 우익 연구서라는 자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은이들은 우익운동이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서구화정책에 반기를 들고 태동하면서 일본 특유의 국가구조인 일왕(천황) 중심의 가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일본 우익의 지도 원리는 일본주의와 정신, 국가주의와 국민주의, 반의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 대아시아주의로 집약된다. 반의회주의와 반자본주의는 언뜻 납득하기 어렵지만 일본의 파시즘과 일왕중심 정치, 황국통제경제론을 떠올리면 그 연원이 어렵잖게 잡힌다. 이 가운데 일본정신은 해설, 분석, 비판, 검토되는 게 아니라 주장, 공감, 직관, 내성(內省)된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탈냉전 이후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후지오카 노부가쓰 도쿄대 교수가 처음 제시한 ‘자유주의 사관’에 기반하고 있다. 후지오카가 내세운 ‘자유주의 사관’은 일본 근·현대사 교육이 자국의 역사에 대한 긍지가 결여된 데다 미래를 전망하는 지혜와 용기가 결핍됐다며 ‘자학사관’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일본 우익은 ‘반성’을 ‘자학’으로 여긴다.

‘자유주의 사관’이 일차적 당면과제로 내세우는 것은 종군위안부나 난징사건과 같은 민감한 근·현대사 사안을 재평가하고 교과서를 다시 쓰는 것이다. 이들이 역사 재평가나 교과서 개정을 통해 의도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익중심의 민족주의의 복원이다. 현대 일본인들에게 국가의식과 국가에 대한 애정이 결핍돼 있으며, 그 근본 원인은 전후의 교과서와 교육에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보면 각종 미디어를 통한 간접 교육도 포함된다.

개헌을 통한 정치·군사 대국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현대 국가는 정치·경제·외교·군사라는 네 바퀴로 전진하고 있으나 일본만 여전히 경제라는 바퀴 하나만 기형으로 커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우익진영은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독도 영유권 문제나 역사 왜곡 망언이 불거질 때마다 정치인들의 인기주의 발언이나 정부의 반짝 대증요법, 혈서나 삭발을 동반한 국민들의 잠깐 분노만 익숙하게 보아왔다. 일이 터지면 이처럼 ‘일본 우익’을 매도하고 우경화를 걱정하면서도 일본 우익연구서 한 권이 겨우 8년 전, 광복 55년이 지난 시점에야 나왔다는 게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