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의 반대말은 의리’라는 한국적 정서가 정치판에서는 한결 도드라진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정치는 의리로 하는 것’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유권자들에게 주입하려 애쓴다. 홍 대표는 지난 주말 “선장의 총애를 받아 일등 항해사에 오른 사람들이 배가 난파할 지경에 이르자 선상반란을 주도하면서 선장 등 뒤에 칼을 꽂고 자기들끼리 구명정을 타고 배를 탈출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당시 새누리당 의원들을 겨냥해 날린 화살이다. 그는 특히 “TK(대구·경북)민심은 살인범을 용서해도 배신자들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다”며 지난 대선 때 했던 발언을 거듭했다.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 말의 다른 버전이란 느낌을 준다. 사실 이 언명은 박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당부했던 것과 사뭇 모순된다. “공직사회에서 정의의 반대말이 불의가 아니라 의리라고 들었다. 공직에 있다면 국가를 위해서 사사로움은 멀리할 줄 아는 자기관리 능력이 필요하다.” 그가 탄핵당한 뒤 구속된 채 재판을 받고 있는 까닭도 정의가 아닌 사사로운 의리를 앞세웠던 탓임을 돌아보면 허탈해지는 대목이다. ‘의리’라는 단어에서 최순실 씨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사람은 의리가 필요해. 내가 지금까지 언니 옆에서 의리를 지키니까 이만큼 받고 있잖아.”
박근혜 정권의 적폐로 말미암아 혁신위원회를 두게 된 자유한국당이 혁신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의구심을 물씬 풍겨난다. 홍 대표가 전권을 주기로 약속하고 영입한 류석춘 혁신위원장이 탄핵 반대에 앞장섰던 인물인 데다 반혁신적 현재진행형 발언으로 당 안팎에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홍 대표의 성향과 의중이 고스란히 반영된 혁신위원장이어서 이런 사태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 혁신과정에서 “탄핵에 앞장 선 분들의 잘잘못을 따지겠다”고 선언한 것부터 개혁 역행발언으로 들린다. 홍 대표가 혁신의 아이콘으로 내세운 그는 과거에도 극우성향의 언행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극우사이트인 ‘일베’를 두둔하는 발언으로 비난을 자초한 적도 있다.
국회의 합법적 절차와 헌법재판소의 전원일치 판단으로 결정된 탄핵을 반헌법적이라고 여기는 인물이 개혁의 칼자루를 쥐었으니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80퍼센트에 육박하는 탄핵찬성 민의와 언론을 협잡이나 일삼는 집단으로 타매하는 것은 반민주적 발상의 극치다. 혁신의 목적이 외연 확장으로 지지층을 넓히는 것임에도 강성 보수색깔을 덧칠해 지지할 수 있는 사람만 겨냥하겠다고 선언한 것 역시 혁신 의지가 다른 곳에 있음을 시사한다.
전권을 쥔 혁신위원장이 임명한 10명의 혁신위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근혜를 옹호하는 인물들로 채워져 고개가 더욱 갸우뚱해진다.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 때 법률대리인으로 활동했던 변호사와 탄핵 국면에서 부적절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20대 여성 혁신위원이 포함된 것은 귀를 의심케 한다. 20대의 젊은 여성이 혁신위원이라면 미래지향적인 혁신방안을 선도해야겠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자유한국당의 혁신위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를 추구한다고 집약했으나 대다수의 민의와 법치를 부정하는 듯한 모순을 드러냈다. 치열한 자기반성과 냉철한 현실인식이 바탕에 깔려야 혁신이 가능하겠지만 합리적 보수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에게 희망을 거는 것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듯하다.
정치에서 의리는 유권자들에게 발휘해야 하는 것이지 조폭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것과는 다르다. 불의를 저지른 인물과의 의리는 그게 곧바로 불의다. 의리는 정의와 결합할 때만 정당성을 지닌다. 겉으로는 혁신을 표방하지만 속내는 혁신과 거리감이 있는 게 ‘홍준표당’이다. 다당체제에서 15퍼센트 정도의 지지층을 견인하는 게 제1야당 지위에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지 않고선 생각할 수 없는 혁신작업이다. 합리적인 보수당을 지향하는 바른정당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좌표설정이 바로 ‘태극기집회’에 있다고 보는 현실적 추론도 여기서 나온다.
제1 보수정당의 환골탈태를 기대하는 것은 그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한국정치와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다. 바른 정당과는 부정적인 의미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혁신에 소극적인 ‘홍준표당’의 지향점이 그래서 의뭉스럽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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