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한국 정치인들이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주 쓰는 말이 ‘금도’(襟度)다. “금도를 넘었다” “금도를 벗어났다” “금도가 무너졌다” “금도를 지켜야 한다”와 같은 말이 하루가 멀다고 들려온다. 상대방이 지나친 언행으로 공격 했을 때 주로 동원하는 반박 표현이다. 대통령, 국회의장, 당 대표라고 예외가 아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지난 주말 이언주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다. 이 원내수석은 “정치공세에도 금도가 있는 것이다. 우리 대선후보와 전직 대표인데 그분들이 아무리 비판하고 싶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것”이라며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겨냥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 준용 씨 취업특혜의혹과 관련한 ‘제보조작’ 파문에 대해 추 대표가 ‘머리자르기’라는 용어로 공격하자 국회 일정 전면 불참선언과 함께 나온 논평이다.
금도라는 낱말에는 선을 넘는다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어디에도 없다. 금도(襟度)는 선비의 폭넓은 소맷자락처럼 다른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도량이어서 ‘보여주거나’ ‘발휘해야할’ 성향의 언어일 뿐이다.
금도가 진정으로 머물러야할 곳은 강하거나 칼자루를 쥔 쪽이다. 지금의 정치상황이라면 집권여당과 청와대다. 취임 2개월째 80%를 넘나드는 대통령의 지지율과 50%를 넘는 여당의 지지율은 흔히 보기 힘든 광경이다. 검찰수사와는 별개로 국민의당 제보 조작파문과 관련해 추 대표가 ‘머리 자르기’ 발언에 이어 연일 강성으로 대응하는 것은 현명하다고 보기 어렵다. 전형적인 ‘금도 빈곤’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는 상대당이 스스로 석고대죄하도록 만드는 게 더 지혜롭다. 정치게임으로만 보더라도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은 가산점이 될 수 없다. 낯을 들지 못해야할 정당이 ‘국민의당 죽이기’, ‘패자에 대한 정치보복’이란 거친 언사로 반격을 가해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서다.
집권당 대표의 언행은 사소한 것에도 남다른 무게가 실린다. 그렇지 않아도 집권여당은 다수인 야당을 설득해 문재인 대통령이 제출한 추가경정예산안과 정부조직개편안 같은 발등의 현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야할 중책을 지녔다. 화급한 국무위원 인사청문회와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 숙제도 상존한다.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새 정부를 도와주지 못하는 것 같다는 뒷말이 나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상식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르는 정치적 묘방이 숨겨져 있는지는 모르겠다. 추 대표는 얼마 전 ‘5행시 이벤트’로 전당대회를 앞둔 자유한국당에 직접 저격수로 나선 적도 있다. 집권당 대표는 국면을 넓게 보고 정국을 이끌어 갈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바른 길이다. 여소야대인 정치구도에서 금도의 정치 역량은 더욱 절실하고 긴요하다.
한미 정상회담과 주요20개국(G20)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금도를 발휘할 시점이 도래한 듯하다. 외교 무대의 성공을 바탕 삼아 국내정치를 조속히 안정적으로 다질 필요성이 커졌다. 문 대통령은 송영무 국방부장관 후보자와 조대엽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의 정식 임명이라는 뇌관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해야 한다. 귀국 당일인 10일을 두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재송부 시한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야3당이 두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두 후보자 임명을 강행한다면 여야 관계가 급랭하며 7월 국회운영이 결정적 타격을 입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장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로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란 판단은 성급하다. 외려 임명을 강행해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보다 작은 아픔을 감수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청와대는 여론만 보고 가겠다지만 두 후보자에 대해서는 여론조차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문제의 인사들이 개혁 과제 수행의 적임자로 흔쾌히 인정받기 어려워서다. 개혁에 방점을 두고 있는 정의당마저 반대하고 있기도 하다.
지지층에서도 문재인 정부가 야당을 좀 더 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적지 않다.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새로운 조타수가 필요하다는 여론에도 귀를 열어놓아야 한다. 금도 정치는 칼날이 아닌 칼자루를 쥔 쪽의 덕목이다.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놓치면 좋은 정치가 아니다. 높은 지지율의 대통령이 금도의 정치가 필요할 때는 통 큰 리더십을 보여주는 게 국민은 물론 자신에게도 바람직할 것 같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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