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마치 이사(李斯)의 상소문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읽은 진시황의 심정과 흡사한 듯하다. 홍 후보는 투표일을 사흘 앞두고 바른정당 탈당 의원의 복당을 허용하고 친박근혜계 핵심 의원들의 징계 해제조치를 전격적으로 단행해 세를 과시했다.
이사의 상소문은 덧셈정치의 표본처럼 회자된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음으로 그 높이를 이룰 수 있었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음으로 그 깊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홍 후보가 바른정당을 떠난 비박계 의원들의 복당과 당원권이 정지된 친박 의원들의 징계 해제를 밀어붙인 명분은 ‘보수 대통합’에 의한 막판 역전승이다. 바른정당 탈당파 회군에 대한 자유한국당 친박계의 거부감과 반발이 만만치 않자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복당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친박계 핵심의 정치적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카드다. 선거 막판에 1~2위가 뒤바뀌는 ‘골든크로스’를 노린다는 게 홍 후보의 전략이지만, 1위와 지지율 격차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성공여부는 불확실하다.
이 때문에 경쟁후보 진영의 논평대로 “질 것이 뻔한 대선은 안중에 없고 대선 이후를 대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시각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렵다. 도로 새누리당을 만들면 대통령 선거 뒤 홍 후보의 당권확보에 유리한 것은 물론 야당으로서의 몸집도 불려놓을 수 있어 일석이조일 가능성이 큰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른정당과의 보수진영 주도권 싸움에서도 자유한국당이 세 대결로 몰아갈 수 있는 터전을 다지는 데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국정농단 문제가 있었던 친박들을 용서하자는 홍 후보의 주장은 국민 정서나 정치 도의상으로도 설득력이 털끝만큼도 없다. 이번 대선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으로 인한 탄핵·파면 때문에 치러진다는 사실을 잊고 있거나 무시하는 증거 밖에 되지 않는다.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에 대한 열망이 담긴 선거의 의미를 폄훼하는 처사다. 국정농단의 책임을 지고 쇄신하겠다며 당 이름까지 바꾼 뒤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지금 박근혜 탄핵과 구속을 끝까지 반대한 친위대를 용서해 ‘도로 친박당’이 됐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한국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혁신 쇼를 벌였지만 적폐의 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재확인시켜줬다. 나라의 미래는커녕 정치야욕만이 넘쳐나는 구태를 저버리지 못한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우리가 압승하기 위해 바른정당에서 오려는 사람들도 다 용서하자’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우선은 좋은 편을 취한다는 경구가 제 격인 상황이다.
보수진영에 국한시켜 봐도 ‘도로 새누리당’이 홍 후보와 자유한국당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보긴 힘들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마지막으로 공표된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 15~20%는 박근혜 탄핵을 반대한 ‘태극기 집회세력+α’에 불과하다. 박근혜를 무조건 두둔하는 ‘애국 보수’를 기치로 내건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에 기대는 보수 정당에 희망은 없다. 국민과 진짜 보수를 배신한 게 박근혜와 새누리당이었음을 애써 눈 감는다고 세월과 함께 지워지지 않는다.
대선 후 홍 후보의 입지도 불확실하다. 또 다시 혁신을 운운하는 과정에서 친박계의 기세가 등등해 진정한 재건축은 뒷전으로 밀려나날 개연성이 크다. 당의 내홍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으로 극한 정쟁을 촉발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이 벌써부터 어른거린다.
썩은 상처를 도려내야 새 살이 돋아나는 건 상식이다. 미봉 상태로 넘어가면 더 큰 병으로 번져 끝내 고치기 어려워질 확률이 높다. 보수의 개혁은 뼈를 깎을 각오로 해도 모자랄 판이다. 보수에겐 수구를 떨쳐버리는 용기가 요긴하다. ‘부패기득권 세력의 온상’이라고 낙인이 찍히면 회복하기 어렵다.
이사가 상소한 태산과 바다는 홍준표의 자유한국당과 다르다. 이사는 천하의 인재를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걸 경계했다. 어디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와 치명적인 오물까지 마구 받아들인 태산과 바다는 삶의 터전을 제공하기는커녕 목숨을 앗아가는 무기가 될 뿐이다.
이 칼럼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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