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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구매자 후회와 장미 대선

 언제부턴가 ‘투표한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자극적인 감정표현이 상례화했다. 파면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뽑은 유권자들만큼 그런 상념이 두드러진 사례도 드물 것 같다. 물건을 사고 나서 자책하는 ‘구매자 후회’(buyer’s remorse)와 다름없다.


 소비자들은 적절하지 않은 상품을 비싸게 산 것을 곧잘 후회하곤 한다. 상당수 구매자들은 판매자에게 설득당해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산다. 그것도 직업적인 구매자가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논리에 근거해 구매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유권자 후회’(voter’s remorse)도 충동구매를 한 뒤 한탄하는 구매자 후회와 흡사하다.


 성경에 구매자 후회에 관한 첫 기록이 등장한다고 해석하는 종교인도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뱀의 꾐에 넘어간 이브와 아담의 얘기가 그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간교한 뱀의 구매 권유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뱀이 이브를 유혹하고, 이브가 아담을 부추긴다. 결국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는다. 하나님의 저주가 뱀은 물론 이브와 아담에게도 내린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구매자 후회를 하는 꼴이다. 구매자 후회는 원죄와도 가깝다는 의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공화당 후보 시절 ‘구매자 후회’를 언급한 적이 있다. “이것은 위스콘신 주에서 이미 조기투표를 마친 유권자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한 분들은 ‘구매자 후회’를 겪고 있을 겁니다. 재투표를 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젠 자신을 뽑은 유권자 가운데 후회하고 있을 사람이 제법 많을 법한데도 그랬다.


 유권자 후회는 투표가 이성적인 정치행위가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투표를 단순하고 감성적으로 한다. 영국 작가 헥터 먼로의 냉소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국민은 분노에 투표하는 것이지 올바른 평가를 내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은 어떤 것에 찬성해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반대해서 투표한다.”


 19대 대통령선거는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현상들로 말미암아 유권자들도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어떤 관전자는 초현실적인 대선판이라고 평할 정도다. 상당수 유권자가 사상 첫 보궐선거여서 빙상 경기의 쇼트트랙에 비유될 만큼 단기전으로 치러져 선수의 진짜 실력을 파악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한다.

                                                            

  막판의 후보 사퇴와 연합, 안보 이슈, 네거티브 같은 3대 변수도 유권자 후회 여부를 좌우할 관건의 하나다.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여권과 야권의 대결구도가 무너지는 바람에 이념, 지역구도, 보수 유력후보가 없는 ‘3무 대선’이 등장해 고질병폐가 다소 사라진 긍정적인 면도 있긴 하다.


 어느 때보다 차악(次惡)선택 논쟁도 가열돼 구매자의 마음을 헷갈리게 한다. 민주주의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면서 유권자를 유인하는 세력이 엄존한다. 특정 후보를 겨냥한 특정 진영의 음모설까지 그럴듯하게 퍼져나가 SNS상에서는 논전이 가관이다. 특정 진영 언론이 반대 진영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한 계략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특정 후보가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유력 후보가 너무나 싫어서다. 여론조작 시도 움직임도 실제로 꿈틀거린다. 이런 것들이 유권자의 충동구매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 십상이다. 유권자들은 건강하고 활력 있는 토론과 정확한 정보를 통해 후보를 평가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다.


 ‘전략적 선택’이라는 미명 아래 난무하는 ‘O찍X’론은 사표논쟁(死票論爭)의 연장선상인 차악론에 대해서도 증오와 분노를 퍼부어댄다. 진보 진영의 차악론, 보수 진영의 차악론이 교직(交織)해 더욱 어지럽다. 후보 차악론의 복잡성은 전형적인 차악으로 불리는 진짜 ‘전쟁’의 딜레마와 흡사하다. 애초부터 이번 선거만큼 보수적인 유원자의 표심이 유력후보의 부침에 따라 갈 곳을 찾지 못해 유랑한 경우도 없었다. 범보수 단일화 요구도 상존한다.


 유권자 후회가 많을수록 후보자들은 이미지와 인기 관리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같은 후회를 반복하는 유권자가 감소해야 정치가 발전한다. ‘장미 대선’으로 일컬어지는 이번 대선이 후보들의 장밋빛 언행에 흔들려 또 다시 구매자 후회를 양산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