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들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일컫는 말은 선거 때 종종 등장한다. 후보자와 공약이 자기와 같은 편인지 판단하기 모호함을 비유하는 상징으로 안성맞춤이어서다. 해가 설핏 기울고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언덕 너머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잘 분간하기 어렵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게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황혼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곧잘 은유한다.
기발하고 시적인 이 묘사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를 각각 개와 늑대에 비유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지혜로운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변증법과 소피스트의 궤변을 식별하는 게 어렵듯이 개와 늑대를 알아보는 일도 간단치 않다고 플라톤은 ‘대화편’에서 털어놓았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닮았으나 소크라테스가 절대적 진리를 말할 때 소피스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역설했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가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음을 유권자들이 지금에서야 절감하고 있다. 상당수의 유권자는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 복지 확대, 국민대통합, 정치개혁을 굳게 공약해 자신들에게 친화적인 개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중도성향의 유권자들은 진보적인 문재인 후보와 견줘보면서 박 후보의 약속을 믿고 선택했을 게 틀림없다. 박 후보를 선택하지 않은 유권자들도 그가 사랑스러운 개는 아닐지 모르나, 자신을 해치는 늑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게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지금 적지 않은 유권자들은 박 후보가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에게 개가 아닌 늑대임이 분명해졌다고 느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생활밀착형 공약인 복지 확대 정책은 부도가 나버려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다. 65세 이상 고령자 기초연금 20만원 지급, 4대 중증 질환 100% 국가 책임, 의료비 본인 부담 상한 50만원으로 인하, 무상보육 시행, 고등학교 무상 교육, 소득 연계 맞춤형 반값 등록금 같은 게 대표적인 것들이다. 사라진 경제민주화와 국민대통합은 더 기대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은 공약 부도에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국민을 윽박질러 늑대의 본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국민이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국제인권감시단체인 프리덤 하우스의 보고서도 이를 방증해 준다. 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을 포함한 권력 남용이 그 근거의 하나다. 개는 주인의 사랑과 뜻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주인인 국민과의 약속을 수없이 어기는 지도자는 충직한 개의 성향으로 볼 수는 없다.
지방선거라는 또 다른 ‘개와 늑대의 시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이 당초 약속했던 기초선거 공천 폐지도 없었던 일로 몰아가고 있는 듯하다. 수없이 파기된 대선공약이 하나 더 늘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지난 주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기초지방선거의 정당 공천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당론을 공식 결정하지 않았지만, 잘 짜인 각본에 따라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야당과 협상해 정당공천 폐지 공약을 무산시키려는 꼼수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기초선거 공천 폐지는 논란이 많아 정답을 찾기 어려운 숙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원칙과 약속’을 트레이드마크로 삼아온 박 대통령에게 다수의 약속위반은 존립 근거를 위태롭게 한다.
이제 유권자들은 소피스트들에게 속아 넘어가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아테네 시민 꼴이 돼 간다.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가 사실상 대척점에 서 있었음에도 철학과 궤변을 구분하지 못하고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양을 지켜주는 충견과 양을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를 제대로 알아봐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번복 개연성이 높은 선심성 공약과 진정으로 유권자를 위한 약속을 분별하기란 어느 때든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지방선거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개와 늑대의 시간’에 판단 실수를 줄이는 노력은 유권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선거 때는 언제나 포식자인 늑대가 먹이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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