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물줄기는 종종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일 하나 때문에 바뀌곤 한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은 2010년 12월 스물여섯 살의 청년 노점상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실자살이 촉발했다. 그의 분신자살은 ‘아랍의 봄’을 점화해 혁명의 물결을 리비아, 이집트, 예멘, 시리아를 거쳐 터키까지 확산시켰다. 1차 세계 대전도 세르비아 출신의 대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를 친선 방문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에서 비롯됐다.
혁명적 현상은 이미 임계점에 도달해 작은 성냥불 하나에도 활활 타오를 뿐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던 부아지지는 경찰의 노점상 과잉단속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이 사건은 억압받던 시민의 공분을 이끌어내면서 장기 독재정권을 붕괴시키는 재스민 혁명으로 승화했다. 1차 세계대전도 민족주의 과잉 상태 때문에 불이 붙은 것이다.
고려대 경영학과 주현우씨(27)의 대자보를 시작으로 들불처럼 확산한 ‘안녕들하십니까’(이하 ‘안녕들’) 열풍도 흡사하다. 주 씨의 대자보는 선동이나 격정과 분노로 점철된 운동성의 글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 보자는 물음이어서 잔잔한 공감과 더불어 답답한 가슴을 파고든다. 대자보는 철도 민영화 의혹,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밀양 송전탑 건설 사태 같은 복합적인 사회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만, 공감의 배경에는 후진 기어로 운전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행태가 깔려 있다.
직접적인 비판의 대상들은 ‘안녕들’이 불편하지만 침묵을 지키는 반면, 과잉충성세력이 나서 곁가지를 물고 늘어지거나 수상한 물타기 작전을 펴는 흥미로운 현상이 엿보인다. 일부 보수언론은 파업 노조원들의 ‘직위해제’와 ‘해고’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식수준이 한심하다고 ‘작은 실수’를 나무란다.
한 보수성향 단체는 ‘안녕들’ 대자보가 주체, 객체, 대상처가 없는 연민과 불만의 토로라고 깎아내리면서 대학생들이 선동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전국 100여 개 대학과 고등학생들, 심지어 해외유학생들까지 가세하는 대자보 열풍이 ‘철없는 학생들이 선동에 이끌린 탓’이라는 앙시앵레짐 논리다. 유신체제시절 대학가의 시위나 지식인들의 시국성명 발표가 있을 때면 으레 따라붙던 수식어가 ‘일부 몰지각한 대학생과 지식인’이었다.
<고려대 주현우 씨가 처음 쓴 대자보>
여기에다 글쓴이가 진보성향의 정당원이라는 사실도 폄훼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 때문인지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 같은 이는 ‘안녕들’ 대자보가 정치권과 연계된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기에 여념이 없다. 대자보의 주장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좌파 진영이 쉴 새 없이 외쳐온 내용이어서 식상하다는 비아냥도 섞여 있다. 이런 비판에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도 “대자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철도민영화가 아닌데…”라고 했지 않은가.
‘안녕들’이 혁명을 부추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주역은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고 깨우친다. ‘사물은 극에 다다르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말한다. 소통을 원하는 국민에게 “저항에 굽히지 않는 게 불통이라면 5년 내내 불통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외려 호통치면 ‘안녕들’의 물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안녕들’의 불길을 뭐라고 보고하고 어떤 대응책을 건의했을지 궁금하다. 루이 16세는 1789년 7월14일 아침잠이 채 깨기도 전에 로쉬푸코 리앙쿠르 공으로부터 바스티유 감옥 함락 소식을 보고 받았다. 그러자 루이 16세는 “이것은 반란이다”고 했다. 리앙쿠르 공은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고 진언했다.
루이 16세는 바스티유 감옥 함락에 숨은 뜻을 알지 못한 채 그날 일기에 ‘리앵’(Rien, 영어로 Nothing이라는 의미)’이라는 단 한 단어만 기록했다. 전날 사냥을 나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날 일어난 바스티유 감옥 함락이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않은가. 박근혜 대통령이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에 빗대 ‘말이안통하네뜨’라는 풍자가 유행하고 있는 걸 가볍게 여겨선 곤란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