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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변화에 반동하는 보수의 3가지 논리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앨버트 O 허시먼 | 웅진지식하우스

“복지도 결국 생산과 연결돼야 하는데 과잉복지가 되다보니 일 안하고 술 마시고 알코올 중독이 되곤 한다.”
 
김황식 국무총리가 지난달 하순 일괄적인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반대의사를 피력할 당시 덧붙인 말이다. 북유럽 복지국가 형태는 역동적인 성장과 낮은 실업률 등 그동안의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는 글로벌 보수진영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기실 이 정도는 약과다. 신자유주의의 정신적 지주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복지국가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 직후 자유·평등·박애라는 혁명 정신이 공안위원회의 독재로, 나중에는 나폴레옹 독재로 바뀌자 ‘자유를 추구하는 시도는 전제정치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역효과론이 거의 강제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의 명저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이 대표적이다.

보통선거권이 도입되기 시작했을 때 진보적 비판자의 한 사람인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조차 다수와 다수의 지배를 혹평했다. “다수는 옳지 않다! 올바른 사람들은 나와 같이 고립된 몇몇 개인들로 존재할 뿐이다! 소수가 언제나 옳다!” <보바리 부인>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보통선거를 극도로 혐오했다. 그는 인민과 대중은 언제나 멍청하고 무능하다는 신념 아래 보통선거권을 ‘정치학의 마지막 단어’라는 멋진 수사를 동원해 조롱했다.

세계적인 비주류 경제학자인 앨버트 O 허시먼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원제 The Rhetoric of Reaction)에서 진보적 역사변환 과정마다 이 같은 역효과·무용(無用)·위험이라는 세 가지 반동 명제가 등장하곤 했다고 분석한다.

허시먼이 관찰해낸 세 가지 반동 명제의 수사학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역효과)
“그래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무용)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위험)로 축약된다.
200여년 동안 보수주의의 반동 레토릭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다.


허시먼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인 1980년대 보수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 신념이 아닌 담론, 수사법 같은 언어적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변환 국면마다 작동하는 이 같은 ‘반작용 레토릭’의 근원을 밝혀냈다. 모든 작용에는 언제나 그와 반대되는 동등한 반동이 있다는 아이작 뉴턴의 작용·반작용 법칙을 원용한 것이다. 진보적 정책이나 사상운동을 뒤집거나 비난하려는 사람들은 어떤 논쟁 태도나 전략을 사용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19세기 보통선거권 도입, 20세기 복지국가 수립과정이 주된 분석 대상이다.

역효과 명제는 정치·사회·경제 질서의 일부를 향상시키려는 어떤 의도적인 행동도 행위자가 개선하려는 환경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견해다. ‘문명의 중요한 진보란 거의 예외 없이 그 진보가 일어난 사회를 파괴하는 과정’이라고 한 앨프레드 화이트헤드의 관점과 너무나 흡사하다. 무용 명제는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논리다. 위험 명제는 변화나 개혁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전의 소중한 성취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주장이다.

                                                 


앨버트 O 허시먼은 보수가 지난 200년 동안 ‘그래봐야 너만 힘들어진다’(역효과명제), ‘백날을 해봐라,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무용명제), ‘복지를 얘기하는 사람은 다 빨갱이다’(위험명제)라는 식으로 혁명과 개혁을 공격했다고 분석해냈다. 사진은 프랑스의 1830년 7월혁명을 주제로 한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변형한 것이다.


지은이는 “역효과론, 무용론, 위험론의 세 카테고리는 단순하지만 완벽하다. 이 틀은 보수가 주장하는 공격의 대부분을 설명해준다. 나 자신도 얼마간 놀랄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이러한 수사학은 자유주의자나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할 때도 닮은꼴로 등장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탁월한 통찰은 한국 현대사는 물론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틀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의 정신이 앞을 향한 진전을 시작한 이후 어떤 이방인의 침입도, 어떤 압제자들의 동맹도, 어떤 편견도 인간을 뒤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 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교훈이다.

저자는 “진보주의자들의 노력과 성과에 대해 회의적이고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대 보수주의자들의 전략은 매우 효과적인 반면에 진보주의자들은 의분에는 강하지만 풍자에는 약하다”고 일침을 놓기도 한다.

지은이는 중국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의 바탕이 되기도 한 ‘불균형성장이론’과 ‘터널 효과’라는 분배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개발국이 부족한 자원을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선도적 발전부문에 집중 투자해 발전 기점으로 키워 나가야 한다는 그의 불균형성장 모델은 한국 경제개발의 지침으로 활용된 바 있다.

경제학·정치학·역사학·인류학 등 방대한 지식을 버무린 데다 부드럽지 않은 문체여서 가볍게 읽히지는 않는다. 이근영 옮김.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