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있는 심리학자 닥터 톤은 이색적인 실험을 위해 참가자를 공개 모집한다. 2주일 동안 사람들을 임시 감옥에 가두어놓고 이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관한 실험이었다. 감옥 생활 경험이 없고, 엄밀한 심리테스트를 통해 뽑힌 스무 명은 각각 14일간 열두 명의 죄수와 여덟 명의 간수 역할을 한다. 즐겁게 시작한 실험에서 참여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진짜 죄수와 간수처럼 변해간다. 차츰 험악해진 분위기는 마침내 금지됐던 폭력이 난무하고 끝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돌변한다. 교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5일 뒤부터 이들은 실험 관리자들을 감금하고 고문까지 했다. 가까스로 탈출한 죄수들은 다시 잡히지만 그 과정에서 죄수 한 명이 죽고 간수도 죽는다. 77번 죄수와 소령의 힘으로 결국 실험을 중단시키고, 때마침 교수가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 <엑스페리먼트>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 필립 짐바르도가 1971년 실시했던 충격적인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각색한 것이다. 실험을 토대로 35년 뒤에 탄생한 짐바르도의 저작 <루시퍼 이펙트>는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란 물음을 던지며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과 악의 뿌리를 궁구한다.
짐바르도는 ‘악한 사람은 그 기질에 원인이 있다’는 기존의 통념을 부정하며 선과 악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모색한다. 인간은 누구나 의지와 달리 순식간에 악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다고 경종을 울린다. 루시퍼처럼 악의 얼굴은 평범하며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마치 “선과 악의 경계는 모든 사람의 마음 한복판에 있다”고 갈파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상통한다.
찰스 프레드 앨퍼드 메릴랜드대 교수의 명저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황금가지)는 악의 근원을 ‘두려움’이라고 본다. 앨퍼드가 직접 일반인, 흉악범, 정신병 환자까지 68명을 만나 정신분석적 방법으로 악의 실체를 탐구한 결과 공통적인 열쇠는 바로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에 쫓기면 조급해지고 영혼을 잃게 된다는 게 앨퍼드의 발견이다. 일반인들이 패배, 죽음, 실연, 따돌림 등에서 악을 떠올린 것과는 달리 흉악범들은 존속 살해, 시체 유기, 강간 같은 범죄를 악이라 여기고 있다.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란 책으로도 잘 알려진 앨퍼드는 ‘악이란 자신의 두려움을 타자(他者)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규정한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기심이 발생하고 악이 드러난다고 한다.앨퍼드는 한국인의 심성에는 서구의 ‘악’에 대응할 만한 개념이 없다고 분석한 바 있다. 선(善)과 이분법적으로 대비되면서 외부에서 우리를 타락시키는 ‘악’에 대한 개념이 한국인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개념보다 좋음과 나쁨의 개념이 더 적절한 것으로 여긴 듯하다.
앨퍼드가 보기에 인간 본연의 양상인 악은 결코 제거될 수 없다. 그는 악과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을 지닌 인류가 악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파괴적 충동의 완충지대를 더 많이 만들어내 범죄자들의 가학증에 배설통로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들은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엽기 범죄자를 낳는다’거나 ‘결손 가정이 악인을 만든다’는 가설을 제시해 왔다.
앨퍼드는 김길태 같은 사람과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악을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볼 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성찰해야 한다는 데에 방점을 찍는다. 악을 제거 대상으로 보는 사회에서 김길태 같은 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에티오피아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탁견을 남겼다. “역사를 통해 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행동하지 않고, 잘 아는 사람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정의의 목소리가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