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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꽃놀이패

입력 : 2008-12-12 17:47:44수정 : 2008-12-12 17:47:58

바둑에서 프로 기사들은 아마추어에 비해 치열하게 싸우지 않는다. 아마추어는 포석도 없이 전투를 벌이는 경우가 흔하지만 프로 바둑은 전투다운 전투 없이 끝나는 때도 적지 않다. 프로 기사는 쾌감보다 승부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둑을 이기려면 강수보다 조금은 약한 수를 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기려고 기를 쓰는 프로 기사들은 조금은 약한 듯한 수를 둔다. 서로 타협하는 듯한 수를 두면 당연히 싸움이 벌어지기 힘들다.

비둘기파는 매파를 응징하기보다 주로 양보한다. 언뜻 보면 비둘기파가 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양보해서 손해를 보는 집의 수와 무리수를 응징했을 때 이득을 얻는 집의 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둘기파의 양보는 약간의 손해로 이어지나 이득을 보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반면 매파는 약간의 이득을 보지만 이따금 상대의 무리수를 응징하다 엄청난 손해를 자초하는 경우가 잦다. 오류의 숫자는 비슷하지만 오류의 결과는 다르다. 결국 매파가 질 확률이 높다. 진화심리학 오류관리이론의 견해다. 인간과 동물은 오류의 수를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이다.

바둑에서는 ‘묘수로 이기는 게 아니라 악수로 진다’는 격언이 있다. 묘수 세 번이면 진다는 명언도 통한다. 바둑의 묘미는 패에도 있다. 두다보면 양패, 만년패, 반패, 늘어진 패, 단패, 꽃놀이패 같은 갖가지 패가 생긴다. 한쪽은 큰 손실을 입지만 다른 쪽은 패에 져도 손해가 없는게 꽃놀이패다. 패를 만드는 편에서는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

대학교수들의 정계진출은 꽃놀이패에 비유된다. 다른 직종의 사람들은 낙선하면 패가망신이나 정치건달이 되기 십상이나 ‘폴리페서’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학교로 돌아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수 신분을 유지하면서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직 등에 진출하는 사람들을 제한하기 위한 법안이 올해 안에 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교수 출신 의원들이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비슷한 여건인 변호사 출신들과 형평성이 어긋난다는 게 반대 이유다.

꽃놀이패 때의 자만은 큰 낭패를 불러오기도 한다. 꽃놀이패를 즐기려다 호구에 돌을 놓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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