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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스포츠의 정치학

입력 : 2008-08-01 17:47:22수정 : 2008-08-01 17:47:35

“그럴 바엔 중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축구팀이 없는 나라가 되자.” “중국 환관(내시)팀이라고 명명하는 게 어때?!” “차라리 사형수를 뛰게 하라.” 중국이 남아공 월드컵 축구대회 예선에서 탈락한 후 국민들의 분노는 이처럼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자긍심의 표상인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있지만 ‘축구재앙’으로 말미암아 ‘신중화주의’ 꿈의 한 축이 무너졌다는 허탈과 배신감으로 가득 찼다. 중국인들에게 월드컵 예선 조기 탈락은 ‘민족적 죄악’과 동의어였다.

스페인 작가 마누엘 바스케스 몬탈반은 ‘바르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한 FC 바르셀로나 축구단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라 없는 국민의 웅장한 무기다. 바르카 팀의 승리는 스파르타를 이긴 아테네의 승리와 맞먹는다.”

“평창은 올림픽 유치 과정의 정치학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로버트 리빙스턴 올림픽 전문 칼럼니스트가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평창 유치위원회에 던진 촌철살인의 한마디였다.

세 가지 사례는 스포츠가 이데올로기화하고 정치적 무기가 되는 대표적인 일화들이다. 지글거리는 여름을 더욱 달굴 베이징올림픽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지구촌의 스포츠 민족주의가 시나브로 절정을 향해 치달을 태세다. 숭고한 올림픽 정신보다 스포츠 상업주의가 앞줄에 나서는 모습도 여전하다.

사회학자 정준영의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책세상)를 보면 현대사회의 스포츠를 쇼비니즘이나 ‘우민화의 도구’와 ‘권력의 시녀’ 같은 통제 기제로만 치부하는 차원을 넘어 다양한 문화적 관점이 접속된다. 그렇기에 그는 스포츠에 숨은 다기한 사회적 함의를 읽어내려면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문화적으로 분석할 것을 권면한다. 섹스, 스포츠, 스크린을 일컫는 3S산업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스포츠가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일깨운다.

지은이는 ‘스포츠는 유희’라는 협애한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어 ‘스포츠는 노동에 가까운 활동’이라는 전제도 한 자락 더 깔고 있다. 즐기는 스포츠라는 개념은 대중매체에 의해 일반대중이 물든 문화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한다. 스포츠가 함축하고 있는 통제의 측면은 노동과 여가의 관계를 해석하는 데도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는 게 저자의 통찰이다. 현대 스포츠의 발전과정이 여가 활동으로서의 스포츠가 생산의 논리에 따라 재조직화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여가가 생산의 논리에 대한 대척점으로 출발했지만 사회 발전과 더불어 여가가 생산의 논리에 포섭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선진 사회에서는 이런 관계가 대부분 외적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달성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선진 사회가 겉으로 보여주는 안정성의 기반이기도 하다. 억압적인 체제의 논리를 가장 큰 피해자인 대중이 흔쾌히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요인은 바로 ‘즐거움’이라는 역설적인 요소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포츠의 세계화는 단일한 현대화 논리가 모든 영역으로 삼투해 들어가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만국 공통 언어이기도 한 스포츠의 지배력이 때로는 이념과 민족을 넘어 세계인을 하나로 엮어주는 진정한 끈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간과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스포츠도 다양한 대중문화 생산물처럼 하나의 텍스트이며, 그 의미의 완성은 수용과정에 크게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스포츠가 언어이긴 하지만 그 속에 가득 찬 복잡한 비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스포츠를 순수한 것으로만 받아들이거나 그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스포츠는 그냥 보고 즐기는 것으로 그치기엔 너무나 중요하고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그렇게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가 사소한 오락과 조야한 선정주의로 타락했다는 저명한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가의 지적은 적절하지만 일면만 타당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