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일요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요즘 잠은 잘 잔다’는 요지의 기사 한 줄을 읽고서다. 며칠 전 청와대로 가 박 대통령을 만난 종교 지도자가 전했다는 당초의 워딩은 이랬다.

 

  “박 대통령은 예상과 달리 상당히 밝은 표정과 맑은 눈이었다. 그래서 ‘잠은 잘 주무시나 봅니다’고 인사말을 건넸더니 미소를 지으며 ‘잠이 보약이에요’라고 하더라.” 대통령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태평성대인 듯 잠을 잘 잔다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인터넷판만의 작은 기사지만, 파장이 커지자 청와대가 곧 정정보도 요청에 나섰다.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다. 워딩이 달랐지만, 종교지도자는 “다른 좋은 약보다 사람한텐 잠이 최고인 것 같아요”라는 박 대통령의 말을 “잘 자고 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얼굴에서 잠을 설쳐가며 걱정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느낌은 종교 지도자가 정정하지 않았다. ‘바깥 날씨는 영하 10도인데 청와대 안은 영상 10도인 것 같다’는 비유법에서도 나타난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광경의 하나는 ‘대구 여고생 자유발언 동영상’이었다. 지난 5일 저녁 박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에서 열린 1차 대구시국선언대회에서 고등학교 2학년생이 거침없이 토해낸 목소리는 현장의 청중은 물론 전국 누리꾼(네티즌)의 심장을 강타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4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정치와 경제를 위해 하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여러분, 그녀가 있을 때도 국정이 제대로 돌아간 적이 있기나 했습니까?”


 원고 없이 8분여동안 기성 정치인들을 능가하는 언어와 논리로 정곡을 찌른 이 학생의 말은 박 대통령이 당장 퇴진해도 대한민국의 국가운영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웅변한다. 이 여고생은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걸핏하면 ‘판단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청소년들’이라고 폄하하며 참정권도 주지 않는 나이대다.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이 상황의 심각성을 여전히 모른다고 푸념을 섞어 걱정하거나 비난한다. 그럴 판단능력이 있다면 ‘이게 나라냐’는 얘기가 나오겠는가.

                                                                               


 그렇더라도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실권을 거국내각 국무총리에게 넘기고 임기를 채우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는 주문이 많다. 내치는 총리에게 맡기고 외교와 국방만 대통령에게 권한을 남겨두면 된다는 얘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발 빠르게 통화하고 한미 동맹을 재확인하는 것을 보면 안심이 된다는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미 해외에서 온갖 조롱거리가 됐다. 외국 정부라고 그런 한국의 국가원수를 정당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보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치욕을 예견한 박 대통령은 오는 18일 열릴 예정인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참석도 포기했지 않은가.


 대통령이 내란·외환죄를 제외하고 임기 중 소추를 면하도록 규정한 헌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견해도 나온다.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하야 요구가 분출할 수 있는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는 논리다. 그건 이미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전례가 있음을 간과한 주장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과 비슷한 사례가 또 다시 나온다는 건 상상조차 해선 안 될 국가적 불행이다. 

                                                                                   


 대통령 궐위 때 60일 안에 대선을 치러야 하는 여야 모두 대통령 선거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주장도 곁들인다. 일견 맞는 말 같지만, 야당에 견줄 만한 후보가 마땅치 않은 것처럼 보이는 새누리당의 속내일 뿐이다.

  이정현 대표를 비롯한 친박계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자신 있으면 하야를 주장하지 말고 탄핵을 시도하라고 부추긴다. 나라 걱정은커녕 부끄러움을 모르는 호위무사들이 절차상 까다로운 탄핵 카드로 지켜주겠다는 꼼수와 다름없다.


 지난 12일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린 사상 최대 규모의 100만명 촛불 시위에서 충남 공주에서 온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한 게 자괴감 들고 괴로우면 그만 두세요.” 천진한 어린이의 말이지만 이게 민심이다. 이런 대통령이 이대로 대한민국과 5천만 국민을 2선에서 지켜보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1년5개월은 너무 길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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