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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개성공단, 대화의 끈은 남아 있다

 

 개성공단의 주춧돌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몰이 방북’이 놓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정 회장은 1998년 초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소 1,001마리를 직접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이 ‘기상천외한 사건’에는 세계가 주목했다. 미국 뉴스 전문 채널 CNN은 트럭에 실려 휴전선을 넘는 소떼 모습을 생중계했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이자 미래학자인 기 소르망은 이 장관을 보고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격찬했다. 영국의 권위지 인디펜던트는 “미국과 중국 간 핑퐁외교가 세계 최초의 스포츠 외교였다면 정 회장의 소떼몰이 방북은 세계 최초의 민간 황소 외교”라고 호평했다.


  정 회장과 소떼 방북은 외환위기 직후 남북 경제협력과 교류에 ‘희망’을 안겨줬다. 그 해 11월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됐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같은 해 8월 남북한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북한은 개성공단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선언 ‘옥동자’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개성공단 입주자 철수>

 
 이처럼 뜻 깊은 개성공단이 남북 갈등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비극이다. 개성공단은 단지 경제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존폐의 갈림길에 선 개성공단을 재개하는 대화를 시작할 명분을 찾을 때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데다, 진행 중인 한미연합훈련이 이번 주 초 끝나면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게다.


  개성공단 폐쇄로 북한 땅에는 단 한 명의 우리 국민도 남아 있지 않지만, 양측이 풀어야할 숙제가 대화의 끈이 될 수 있다. 우리 측 입주기업들이 개성공단에 남겨놓은 완제품과 원·부자재, 우리 측이 보내주고 있는 전기로 개성주민들에게 공급되는 수돗물이 그것이다.


  우리 정부가 입주기업들이 이 문제 협의하도록 개성 방문을 허용하고, 북한 측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대화의 문을 열리는 셈이다. 완제품과 원·부자재는 1억~3억 달러어치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어제(12일) 공단에 남겨둔 설비와 자산을 점검하기 위한 방북 승인을 통일부에 요청했다. 원·부자재와 완성품의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배상과 폐기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우리 기업들의 호소는 외면할 수 없는 과제다.


  평소보다 10분의 1수준으로 보내는 전기의 일부는 개성 인근의 저수지 정수장에서 개성 주민들의 식수를 마련하는데 사용된다. 수돗물 정수에 필요한 약품과 우리 기술자들이 필요한 상황이 오면 이를 대화의 장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수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면 개성 주민의 고통이 심해진다. 정수 대신 지하수를 사용하는 사태가 오면 심각한 위생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실무 차원의 협상으로 개성공단 완전 정상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걸 대화의 고리로 삼을 만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는 모습>


  일각에선 북한이 과거 유고슬라비아 모델을 본떠 개성공단에 있는 남한 기업 소유인 공장 설비 등을 압류해 자신들이 사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으나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북한은 남한에서 전기를 보내주지 않으면 개성공단을 가동할 수 없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스스로 가동하려면 발전소도 건설하고 송·배전시설도 갖춰야 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이 공장을 돌리려면 원·부자재가 있어야 하지만, 이 역시 자체 조달 능력이 없다. 중국이 개성공단에 들어와서 설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성공단 부지를 내놓을 때 내렸던 ‘통큰 결단’의 정신을 헤아려야 한다. 남북한이 서로 길들이기나 자존심 싸움으로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끈이 아직 남아 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에게 히틀러 나치 정권에 대항해 영국이 갖고 있던 최고 무기가 무엇이냐고 한 기자가 물은 적이 있다. 처칠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언제나 ‘희망’이었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의 ‘희망’만은 포기할 수 없다. 개성공단은 바로 그 희망의 화수분이 돼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5월13일자)에 실린 것입니다.